율
"머리 예쁘네."
윤정한은 홍지수의 시선을 곧바로 받아내지 못하며 마주 놓인 의자에 앉았다. 바닥에 나무가 끌리는 소음이 요란했지만 윤정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겉과 다르게 속은 바짝 타오르다 못해 까맣게 변해버린 지 오래다.
봄철에 피는 개나리마냥 노오란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눈들이 하나같이 같다. 두피는 괜찮나. 시선이 쏠리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피곤한지 한쪽 눈에 짙게 패인 쌍꺼풀 아래의 따갑도록 쏟아지는 눈빛은 조금 달랐다. 다리를 바짝 꼬고 한 손으로 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일순 숨이 턱밑까지 박차고 올랐다. 무엇을 말 할지, 그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예상되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도 있지만 윤정한은 홍지수 앞에서 항상 그랬다.
매번 기다리는 쪽은 윤정한이었는데 웬일인지 오늘따라 홍지수가 먼저 와 있었다. 어색했다. 홍지수에게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는 게. 머그에 담긴 두 잔의 커피는 속이 보이지 않도록 온통 검었다. 나 커피 별로 안 좋아하는데. 홍지수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자기가 다 마시려고 그런 걸 수도 있다. 홍지수는 심술이 나면 자기 멋대로 구니까. 오늘은 또 어떤 일 때문인지 모르겠다. 머그를 감싼 손가락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카페 음악에 따라 가볍게 퉁겼다. 무심코 스치던 장면에 못보던 반지가 있었다. 홍지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하고 심플한 디자인. 그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디자인이었어도 윤정한은 비슷한 맥락의 생각을 했을 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홍지수는 운을 띄웠다. 정한아, 있잖아. 입술이 달싹이는 아래로 보이는 긴 목선을 따라 다다른 끝엔 언뜻 쇄골자락이 비쳤다. 으응. 윤정한은 다소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몰라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건 그들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고, 홍지수의 말은 삼일을 채 못갔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 하나의 법칙으로 정립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나 이제, 너 안 만날 거야."
하지만, 어느 법칙이든 예외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작은 언제나 그때로 돌아간다.
아니, 여태껏 시작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이유는 홍지수와의 시작을 정의하기가 무척 쉽지 않았던 탓이다. 새학기가 시작되던 봄의 운동장 구석 벤치, 혹은 손 안에 단단히 쥐었던 탁구 혹은 배드민턴 라켓이나 뜯긴 라인을 따라 공을 튕겼던 농구 코트, 사물함 위의 누구 건지 잘 모르는 새 참고서나 문제집, 아니면 순식간에 코앞으로 들이닥친 9월과 11월, 해가 바뀌며 졸업에서의 수더분한 꽃다발과 다시는 들을 일 없을 시덥지 않은 교가. 지나치도록 순식간의 일 년이었다.
윤정한은 계절마다의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다 사실 그 모든 게 이유임을 알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면면조차 비치지 않았던 다른 모임이나 동아리에 반해, 동창회가 열렸을 때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참여 도장을 찍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늦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자리에 당연히 올 줄 알았던 홍지수가 있었을 땐 누구보다 기뻐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일부러 그쪽을 비집고 들어가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고 앉았다. 유일하게 이유를 아는 고등학교 동창은 왜인지 모르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듯했다.
단지 홍지수 때문이 아니라, 그날따라 윤정한은 기분이 유난히도 좋았다. 나서서 빈 잔을 넘치도록 채웠고, 방긋방긋 웃으며 말도 많이 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엉겨붙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윤정한이 잔뜩 술이 오른 채로 정신없이 누군가와 입술을 비비며 싸구려 모텔으로 들어간 게 모든 일의 근원이었다. 물을 빼러 코너를 돌아 화장실 문을 엶과 동시에 밀어 닥치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붙잡혔다. 벽에 부딪혀 뒤통수가 아릿하게 아파왔지만 그마저도 모든 게 좋아서 정신을 놓아버릴 듯 황홀했던 날. 상대는 공교롭게도 홍지수였고, 사실 윤정한은 완전히 취하지 않았었기에 그 이쁜 얼굴이 홍지수인지 알았고, 그래서 밀어내지 않았고, 나는 취했다! 라는 최면을 단단히 걸었다. 손을 얽어 잡고 네온 사인이 진하게 번쩍이는 간판을 지나가는 동안의 시간은 그동안 기다렸던 시간 보다 훨씬 더 길었다. 문이 닫히고 신발을 벗는 동안 입술이 다시금 맞붙었다. 여린 살이 스치며 셔츠 안으로 파고드는 손길이 꽤나 조급했다. 윤정한이 그랬고, 홍지수는 그랬던 것 같았다. 윤정한의 손이 홍지수를 번쩍 안아들어 얼굴 위로 가볍고 짧은 키스를 퍼부었다. 너, 원래두 이래? 배배 꼬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미미하게 웃던 홍지수의 손이 윤정한의 가슴팍을 만지작댔다. 얇은 천 사이로 닿는 숨결이 따뜻했다. 기어코 윤정한은, 홍지수와 혀뿐만 아니라 몸까지 섞었다.
윤정한은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셨다. 홍지수가 놔두고 간 비타민 때문이었다. 홍지수의 비타민 캡슐은 홍지수만큼 달지 않았지만 윤정한은 간밤의 일을 떠올리고는 한국의 여름처럼 불타오르던 십대 끝자락의 마음을 곱게 접어 다독였다. 반의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홍지수를 만나려면, 홍지수는 죽어도 몰라야 한다. 윤정한이, 홍지수를,
좋아했던 일 같은 건.
그래서 윤정한은 홍지수를 잊기로 했다. 홍지수에게 윤정한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윤정한에게도 홍지수가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으니까. 바보 같았다. 뻔하고 진부한 스토리의 결말이 보기 더럽게 좋게 그려지는데도 윤정한은 어서 유턴하라는 표지판을 무심히 지나쳐 끝도 없이 반듯하게 놓인 사막의 지평선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홍지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도, 그 때문에 쓸데없이 허무맹랑한 상상들을 자주 한다는 것도, 제 생각들을 꺼내면 듣는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한다는 것도, 그래서 제 얘기를 잘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윤정한은 모두 알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털어놓을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거. 홍지수는 생각이 원체 많은 것 같았다. 씻을 때조차 생각이 너무 많아서 때때로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를 줄곧 맞고만 있다 시간이 훌쩍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한 가지 경우에 대해 마음을 기울이다 곧 극에 치닫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기도 했고, 가벼운 와인을 나눌 때 기분 좋도록 취한 날이면 그 걱정들이 술술 흘러나오기도 했다.
정한아 있잖아, 나는... 두려워서 그래.
윤정한은 홍지수의 말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딱 그 말을 들은 처음에만 말이다.
만남에는 언제나 관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홍지수는, 조금이라도 잊으려 사람을 만났다. 상대가 윤정한이 아니어도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조금 나쁜 건 윤정한의 얼굴만한 상대를 찾기 쉽지 않다는 점에 있다. 홍지수는 안목이 높았고 다소 훌륭한 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윤정한을 썩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고 윤정한을 좋아했다. 어떤 의미로의 좋아함이든 윤정한이라면 쌍수 들고 반길 일이겠지만, 사실 그걸 알았을 때 좀 허무했다.
윤정한은 홍지수를 생각하지 않게 해 준다. 다른 누구보다도, 아주 잘. 홍지수는 잊으려고 윤정한을 만났다. 모든 걸 잊을 시간이 필요해서 윤정한이라는 잘 듣는 약을 이용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유가 무색하게도 윤정한이 보는 홍지수는 항상 같은 색의 바다 속에 골몰히 잠겨 있었다. 바르르 떨던 몸이 힘을 놓음과 동시에 젖혀진 고개가 서서히 무너지는 동안 윤정한은 홍지수의 몸통을 두 팔로 감싸며 제 품으로 당겼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모를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 한심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가슴팍을 파고드는 따뜻한 살갗은 그 생각을 순식간에 지워 주었다.
윤정한이 생각하기에 홍지수는, 날이 바짝 선 초승달에 목을 걸, 그런 류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홍지수가 들어도 What? 하고 되물을 만했으나 윤정한은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학주에게 걸리지 않으려 종종 투명한 피어싱 하나만이 얌전하게 끼워져 있던 귀 위의 까만 머리색이 컴컴한 하늘에 기우뚱 떠오른 초승달에 의해 살짝 물들었다. 이것이 윤정한이 노오란 머리를 해야겠다 마음 먹은 이유였다.
"죽어버리기라도 하려고?"
"아니, 아직은."
홍지수는 무서운 게 없었다. 아무렇게나 내뱉고 후회한 말에 홍지수는 깊은 의중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깃털보다 가볍게 대꾸했다. 가끔 윤정한은 홍지수가 되어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뭐지? 그러나 막상 그럴 때면 두려워서 그래... 라는 말만 메아리처럼 왱왱 맴돌았다. 이러면 또 화를 못낸다. 사실 무서운 게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라서.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쑥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담는 홍지수가 괜히 미워져 윤정한은 그릇을 땀이 나도록 박박 닦았다.
홍지수네 집은 깔끔했다. 주방만 빼고. 방 안의 미니 냉장고나 옷장이나 다른 건 다 깨끗한데 싱크대 주위는 온통 엉망이고 주방의 문 두짝 짜리 냉장고는 텅텅 빈 채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윤정한은 그 속을 가끔 캔으로 가득 채웠다. 홍지수는 요리를 잘 못했고 설거지도 귀찮아서인지 안 했다. 애초에 설거지 할 거리를 만들지 않았는데, 누군가 다녀간 듯싶었다.
"지금은 어떤데."
목소리가 모기처럼 기어 들어가며 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됐고 엉킨 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 그러니까... 몸이 어떠냐고. 감기약 잘 안 들으면 딴 거 사오고.
"정한아."
난 네가 있어서 좋아.
설거지 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겠지. 잔뜩 투덜대니 홍지수는 막 웃었다.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이러고 있는 것에 또 한심함이 새어들었다. 윤정한은 이별을 가볍게 언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지만, 그게 정말 눈앞으로 다다를까봐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홍지수는 아니었나보다.
왜 안 만난다고 한 지 이틀 만에 다시 연락해서는.
호구같이 쫄랑쫄랑 총알같이 달려와 바꾸지도 않은 도어락 비번을 두 번이나 틀려 먹고, 결국엔 현관엘 들어서자마자 이불에 꽁꽁 둘러싸인 채 소파 위에 웅크려 쌍꺼풀이 짙게 진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는 홍지수에게 윤정한은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너는 날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건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거였다. 홍지수가 한 말은 삼일을 못간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할 거야. 홍지수는 운동을 정말 안 했다. 타고 난 골격과 근량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헬스장을 끊어놓고도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삼초였다. 이번에도 이틀만에 깨졌잖아. 윤정한은 다소 입술을 삐죽대며 생각했다.
"너, 또 다른 생각 중이지."
오늘따라 홍지수는 집중하지 못했다. 물기가 적나라하게 고인 목소리가 베갯잇에 막혀 흘러나왔고, 다소 신음을 아프게 냈지만 조심스러워지는 움직임을 귀신같이 느끼곤 손을 뻗으며 더욱 보챘고, 윤정한의 살에 아프도록 손톱 자국을 냈다. 문득 젖은 눈을 마주했다. 마음이 약해져, 홍지수가 하라는 곧이 곧대로 하던 윤정한은 부러질 듯 허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려는 발버둥에서 비로소 그 목적을 이루어 잘게 신음하는 홍지수를 바라보며 오히려 윤정한은 생각에 빠진다. 마치 홍지수의 생각이 모두 윤정한에게 전가된 것처럼. 그러면 자연스레 달뜬 시선과 맞닿는다. 오묘하게 내리깐 눈동자가 집어 삼킬 듯 저를 옭아맨다.
무슨 생각 해?
홍지수는 제가 하는 생각 같은 건 입도 벙긋 안 하려 들면서 곧잘 이렇게 물어왔다. 집요하도록 놓지 않는 시선에 윤정한은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항상 이 말은 뺐다. 홍지수 네 생각.
일렁이는 울대 밑으로 삼켜진 생각을 듣지 못한 홍지수는 싱겁다는 듯 눈이 반달마냥 휘었다. 은근히 들어오는 빛에 어렴풋 몸의 윤곽이 잡혔다. 윤정한은 마디가 불거진 손으로 살결을 소심하게 매만졌다. 그러면 윤정한의 반듯한 코를 좋아하는 홍지수는 미끄럼을 타듯 콧대를 슥 쓸어내렸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다 순식간에 떨어지면 윤정한은 다소 어리광을 부리듯 홍지수의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홍지수는 자그만 웃음소리를 내며 윤정한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간지러움은 곧 무시할 수 없는 자극이 되어, 홍지수는 이내 제 것을 세우려고 했다. 윤정한은 내심 짓궂게 모른 체하다, 입술을 아래로 점점 아래로 향하면 살갗에 선단이 닿았다. 그는 흠칫 떨리는 몸을 가볍게 당겨 안았다. 네 생각을 궁금해 하는 윤정한의 생각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에 대해 안도하면서도, 윤정한은 어쩔 수 없이 우울해 했다.
홍지수는 그런 윤정한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아직도 모든 게 잊히는 기분일까. 누구도 찾지 못하는 깊고 어두운 나락 속으로 끌어내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동그라진 기분일까. 터질 듯한 심장의 박동이 귓가를 가득 메우다 제 목소리가 들리면 삽시간에 그토록 바라던 세계에서 끄집어 올려지는 기분일까. 그래서 너는 나와의 관계를 맺는 걸 좋아하다가도, 끔찍이도 싫어할까. 아마도 홍지수는, 윤정한을 싫어하지 않았다.
윤정한은 홍지수가 우리에 대해 할 가장 극한의 상상을 해 보았다. 그게 헤어짐은 아닐 거란 건 안다. 홍지수는 누군가가 없이도 혼자 잘 살 테니까 말이다. 홍지수의 주방은 제외하고. 그가 생각하는 극은, 홍지수가 정말 윤정한을 사랑하기라도 되어 버리는, 그런 것일 테다.
윤정한은 이 순간을 기억하려 홍지수의 손을 잡았다. 잊기 위해 윤정한과 관계를 맺는 홍지수와는 달리, 잊으려 하는 손을 붙잡고 연신 이름을 속삭였다. 홍지수, 지수. 지수야. 너도 마찬가지로,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안간힘을 무참히 깨어버리고 윤정한은 홍지수의 위에 저를 뒤집어 씌운다. 제 속에, 제 눈 앞에 있는 이조차 잠시 잊어버리는 순간까지, 오로지 저만을 기억하길 간절히 원하면서.
동그랗게 맺힌 콧방울에 힐끗 눈길을 두다 귀에 대롱대롱 걸린 피어싱이 바뀐 걸 알아챘다. 십자가 모양이었다. 아직도 교회를 다니는지는 몰랐으나 홍지수가 예배당 끄트머리에 조용히 앉아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모습은 너무나 쉽게 그려졌다. 선물 받았나, 아니면 산 건가. 윤정한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홍지수를 전부 알고 싶었다. 아무래도 홍지수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겁내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다 막아줄 수 있는데. 윤정한은 홍지수가 무엇을 잊고 싶어 하는지 잘 몰랐지만, 그것을 저로 덮어버리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그 새벽의 끝자락에, 홍지수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하루도 안 남은 시간을 아쉬워하다가도 윤정한은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몸을 바르작거리자 저절로 느슨히 풀리는 손에 멀어진 시선 새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애가 달았다. 홍지수의 고개가 반듯이 들렸다. 나, 갈까? 무겁게 내뱉은 말에 홍지수는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게슴츠레 뜨인 시선이 얽히며 이내 완전히 감겼다. 전희는 조급했고, 후희는 다소 집요했다. 비로소 윤정한은 홍지수의 목덜미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들으며 윤정한은 큰 눈을 끔뻑였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새벽이 지나친 오전에는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