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해
익명
야한 남자.
윤정한의 별명이었다. 진짜 마인드가 변태적이거나, 생긴 게 섹시한 건 아니고,
“야, 나 이것 좀 봐줘.”
“야! 나도 축구 간다!!”
“야아-, 나도 끼워주라. 응??”
“나 하룻밤만 재워줘. 늦어서 긱사 가면 벌점이야. 야!! 듣고 있어?? 야아!!”
“야, 거기 둘. 동방 청소 좀 해라. 회장님은 몹시 피곤하여 자러 간다.”
자신과 조금 친하다 싶은 사람들을 -선배들이나 교수님은 당연히 제외 하고- 부를 때 지칭하는 용어가 ‘야’로 통일 되어 있어서. 윤정한과의 친함의 정도, 또는 윤정한이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는 정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윤정한이 자신을 부를 때 ‘야’라고 부르면 친한 거고 아니면 아직 친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너무도 간단해서,
“지수야, 오늘 저녁에 밥약 있어?”
“아니. 없어.”
“아싸, 그럼 나랑 같이 밥 먹자.”
나는 더욱더 서글퍼진다.
야해
대학교에 갓 입학 했을 때, 동아리 가두모집에서 윤정한을 처음 봤었다. 다들 부원을 한명이라도 더 모집하려고 혈안이 되어서는, 지나가는 신입생들을 잡고 물어지는 와중에, 혼자 동아리 부스에 아주 편하게 앉아, 여유롭게 폰이나 만지고 있어서 무척이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강요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동아리에 자신 있어 보여서 그 동아리에 호감이 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부스 앞에 서서 게임을 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오지랖을 떨어버렸다.
“동아리 홍보 안하세요?”
내가 묻자 그는 그제야 휴대폰에서 눈길을 뗐다.
“아, 저도 신입생인데 어쩌다보니까 여기에 앉아있는 거여서요.”
그리고 꽤나 불쾌한 질문이었을 텐데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친절히 웃으며 내게 답했다.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동아리 부원이 맞는데 내게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식의 표정을 짓자 그는 덧붙여 말했다.
“제가 여기 가입하려고 왔는데 수업 가셔야 했나 봐요. 저보고 가입 신청서 냈으면 동아리 부원이니까 와서 자리만 좀 지키라고 하시던데요?”
“그 쪽은 수업 없어요?”
“네, 오늘 열한시 수업이 첫 수업이자 마지막 수업이어서요. 아주 여유로운 탓에 붙잡혔죠.”
이렇게.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책상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A4용지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동아리 가입하시고 싶으시면 학과, 학번, 이름, 번호 적어주세요. 이따 선배님들한테 전해드릴게요.”
“앗…. 아…, 죄송한데 다른데 더 돌아다녀 보고 결정하려고요….”
나의 말과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서리니 그는 또 웃으며 종이를 눈앞에서 치우고 대신 이번엔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친해지고 싶은데 그 쪽이 여기 동아리 가입 안하면 볼 기회가 없잖아요. 그래서.”
“네?”
“첫 느낌이 좋은 사람들은 진짜 오래 가더라고요. 근데 그 쪽은 느낌이 확 왔어요. 뭔가 우리 짱친 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
그리고 또 번호 알아서 톡 하다가 마음 맞아서 같은 동아리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럼 더 친해지고 자주 만나고. 어때요, 아주 좋죠?
그리고 그의 현란하고 능글맞은 말솜씨와 얄궂은 미소 한 번에 홀려 그만, 나는 빼앗기지 말아야 할 마음까지 빼앗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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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쩌다보니 영화토론동아리에 가입했고, 정말로 윤정한과 나는 그 누구보다 친해졌다.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연히 공강이 겹칠 땐 항상 붙어 다녔고, 자주 보는 같은 과 친구들보다 공식적으론 일, 이주에 한번 볼까 한 네가 더 편했다. 분명 윤정한도 말로는 항상 내가 과동기보다 훨씬 편하다고 했다. 그러나 점차 동아리에 적응 하면서 윤정한과 친해지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가자 그 사탕발린 말들이 묘하게 불편해짐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윤정한은 진짜 친해지고 편해지면 호칭부터 바뀌었다.
야.
“야, 축구 뛰러 갈, 어! 지수다!”
생글생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나는 기분이 지금 별로 좋지 아니한데, 너는 뭐가 그렇게 좋아!
나는 큰 거 안 바랬는데. 진짜 좋아하는 마음 따위도 다 버리고, 그냥 ‘대학교 와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 ‘편한 친구’ 정도면 되는데.
그럼에도 섭한 마음을 티내면 혹시 더 멀어질까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윤하-.”
(*윤하 : 윤정한 하이)
“왜 동방 자주 안 와, 요즘?”
너가 나한테 거리 두는 거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 왜!!
“곧 중간고사니까.”
“아-, 그러네. 또 공부하러 갈 거야?”
“밥 먹고 가야지.”
“그럼 나랑 같이 먹고 가.”
“너 축구는?”
“안 해도 돼애-, 나한텐 우리 지수가 더 소중하니까!”
“아, 또 왜이래!”
활짝 웃으며 안으려 드는 걸 힘껏 밀어내지만 윤정한이 밀려 주는 건지 내가 밀친 건지 잘 모르겠다. 도망치듯 “나 간다!”를 외치고는 동방을 나와 곧장 도서관으로 향한다. 볼이 화끈 거려 손바닥과 손등으로 얼마나 볼을 매만졌는지 모르겠다.
좋은 건 좋은 거고. 그럼에도 섭섭함은 가시질 않는다. 오늘은 한 번 쯤 ‘야’라고 불러줄 줄 알았는데.
아니 내가 먼저 말할 걸 그랬나?
정한아, 이제 지수야 말고 ‘야’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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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터맨 학우 여러분들. 중간고사도 끝나고 한층 쌀쌀해진 가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오늘 저녁 6시 후문 앞 성수포차에서 동아리 회식을 할까 합니다! 식당 예약을 위해 참여 가능하신 분들은 5시까지 투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리며, 이따 봐요~♡]
윤정한이 올린 동아리 단톡 공지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나는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냥 읽고 씹었다. 그러나 잠시 뒤 윤정한은 내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지 기가 막히게 갠톡을 보내왔다.
[조슈지~ 중간고사 다 끝난 거 아니까 동아리 회식 빼지 말고 와라~ 안 그럼 나 삐진다? 나 이제 화석이라 너 아니면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ㅠㅠ]
[최승철은?]
[걔는 와도 소용이 없어ㅠㅠ 맨날 지훈이랑 논다고ㅠㅠ]
[나 피곤한데..]
[거짓말.]
[뭐랰ㅋㅋㅋ 진짜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ㅇㄴㅋㅋㅋㅋ 가는 대신 나 술 조금만 마신다?]
[오예! 이따 봐~]
그랬는데 내가 지금 몇 잔을 마신 거지…?
하나…, 둘…, 셋…….
“홍지수…, 너 조금만 마신다며…?”
“어…? 히히, 조굼만 마셨눈데? 나 이제 한잔 마셨눈대….”
나는 자꾸 잇새 사이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윤정한의 물음에 내 앞에 놓인 빈 술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봐바! 한 잔! 어라, 잔이 비었네, 흐히-. 내가 가득 채워주께에-.”
“아, 미치겠다. 지수야, 우리 일어날까?”
“뭐야아-. 니가 오자매애-. 아, 잠시만-.”
“왜왜!! 토하고 싶어??”
“아니, 내 어이가 도망갔어. 너 때문에!!”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제멋대로 입이 막 움직였다. 눈은 자꾸 감기고, 주변은 시끄러움이 중첩 되어 무슨 외계어 마냥 들려온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윤정한의 목소리는 들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야, 나 지수 데려다 줘야 할 거 같아. 이걸로 결제 너가 좀 해줘라. 바로 올게.”
야.
“아차차- 미안. 그 카드가 아니네. 이거, 이거. 금방 온다니까? 야, 너 나 못 믿냐?”
야.
“야! 쟤, 뻗었다. 빨리 빨리 취한 애들은 집 가고. 야야, 거기 너 옆에 친구 뻗었으니까 책임지고 데려가라.”
나는 내 팔을 꽉 잡고 함께 중심을 잡아주고 있던 윤정한의 팔을 푼다.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바로세우며 윤정한의 눈을 정확히 보고 말한다.
“야.”
나는 누구처럼 야한 남자가 아니어서, 단 한 번도 남을 부를 때 그렇게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근데 심술이 나서,
남들은 다 그렇게 부르면서,
나는 안 불러 주니까.
“야.”
남들은 장벽을 허물고 다 자기가 설계한 경계 안에다 두면서 나만 밀어낸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내가 부른다.
“야.”
흩어지는 목소리가 처량하다. 결국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실망, 그리고 나에게 한 구석도 내어 주지 않는 윤정한의 고집스러움에 자존심이 상한다.
“지수야. 왜 그래?”
“‘야’해줘.”
그래서 이왕 이렇게 상해 버린 거 다 내다 버리기로 했다.
“어…, 어? 지, 지수야 일단 나가서,”
“‘야’해!!”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시끄럽던 술집이 싸한 적막에 쌓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으나 직감적으로 그들이 우리를 흘긋대는 것을 느낀다.
이런 와중에 웃긴데 죽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면 술이 조금씩 깨어간다는 거, 하나?
이미 단정하게 셔츠 단추가 꼭꼭 모두 잠겨있는데도 당황하면서 손으로 더듬더듬 몸을 가리는 윤정한, 둘?
저 멀리서 차마 소리는 못 내고 웃겨서 뒤로 넘어가는 최승철, 셋?
갑자기 해일처럼 나를 집어 삼키는 창피함에 가게 문 밖으로 뛰쳐나가 인도 위를 비틀대며 뜀박질 하는 나, 넷?
어느 샌가 나를 따라 잡아 내 어깨를 잡아 세워, 위험하니 뛰지 말라고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말하는 너, 다섯?
너의 몸에 베인 다정함에 새삼 다시 반한 나, 여섯?
아무렴 그런 중에도 여전히 너에게 ‘야’ 소리를 듣고 싶은 나, 일곱?
“나 진짜 개 섭섭해. 나랑 친하다며!! 나랑 짱친이라며!! 근데 왜 ‘야’라고 안 해? 너 다른 사람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다 ‘야’라고 부르면서 나는 왜…!”
“너한테는 그렇게 부르기 싫으니까.”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고집피우는 너, 여덟?
“왜? 왜 싫은데? 사실은 내가 불편해서? 그래서 그래?”
마주하기 싫은 사실이면서도 굳이 마주해 스스로에게 상처 주는 나, 아홉?
“아니야 그런 거.”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잔뜩 굳어진 목소리로 선을 긋는 너, 열.
HP. 0.
_
눈을 떠보니 너무도 익숙한 내 집이 아닌, 그 정도로 익숙한 윤정한의 자취방 침대 위였다. 안타깝게도 잘난 나의 머릿속에선 전 날의 기억이 단 한 톨도 날아가지 않았다. 나는 내 볼을 양 손으로 철썩 철썩 때리다 뒤척이는 윤정한에 손을 멈추고 곧바로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열고 탈주했다.
짜증나리만큼 유난히 하늘이 예뻤다. 잔잔하게 깔린 구름에 하늘은 제 색깔을 조금 양보했다.
나도 그냥 한 발 양보할 걸.
다 지나서 후회를 한들 바뀌는 게 있을까. 그저 하늘을 바라보다 폰을 꺼내 그대로 동아리 단톡을 나와 버렸다.
다시는 동아리 원들과 마주치지 않게 해주세요. 특히 윤정한이요.
속으로 온갖 신들을 다 불러대며 빌고 또 빌었다.
네가 미웠다. 끝까지 너는 내게 마음 한 번을 안 열더라.
어쩜 그렇게 가혹한지.
내가 네게 너무 큰 걸 요구한 건지.
수도 없이 생각해도 결국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결국 내 잘못인 것이었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고, 내가 너에게 자꾸만 바라는 게 많아져서, 모든 게 내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참사라, 나는 자꾸만 ‘윤정한’이라는 세 글자를 내게 내 비추며 울려대는 휴대폰을 보면서도 묵묵히 묵언수행 했다.
주말까지 껴서 한 3일 정도를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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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가 끝난 도서관은 너무나 한산했다. 너무 고요해서 마치 나로 하여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로.
나는 인문 서적 코너로 가 아무 책이나 손에 집히는 것을 골랐다. 그리고 도서실 내 비치되어있는 소파에 앉아서 읽어 내려갔다. 생각이 많을 땐 조용히 책 읽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또 휴대폰이 소리와 함께 진동하기 시작했다. 금 같은 침묵이 와장창 깨졌다. 나는 황급히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소리를 끄기 위해 아무 키나 마구 눌렀다. 그러나 당황한 손이 차마 누르지 말아야 할 키를 눌러버려 휴대폰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윤정한의 목소리.
-홍지수! 지수야!!
나는 소리가 나오는 윗부분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눌렀다. 소리가 덜 새어나가게 하려고. 그리고 냉큼 도서실 밖으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윤정한의 목소리가 들리는 휴대폰을 귓가에 댔다.
-어? 끊어 졌나? …아닌데? 지수야 내 목소리 들려?
여전히 그에게 있어 나는 ‘지수’였다. 아무리 올라서도 끝이 없는 윤정한의 담벼락에 나는 전의를 상실해 주르륵 미끄러졌다. 마음이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답답해서 주먹 쥔 손으로 몇 번이고 가슴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갑갑함은 풀리지가 않았다.
눈물이 기어코 눈꼬리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온다. 나는 윤정한의 목소리를 끊고 양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렀다.
새삼 그 목소리가 반가워서 더욱 짜증이 났다.
한참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울음을 삭히며 눈물도장을 팔등에 찍어냈다. 서러움이 닿는 곳마다 연 파랑의 후드 티 색이 진해진다. 더욱 열불이 나는 건 자세히 보니 이 티마저 윤정한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작년 겨울, 그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티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분함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방울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에 황급히 손으로 눈물을 훔쳐낸 후 자연스럽게 도서실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평정심을 찾으려면 책이 급했다.
“홍지수.”
그마저도 제지당한다. 뒤에서 나를 안아오는 팔에. 따뜻한 품에.
그리고 윤정한의 목소리에.
“왜 말도 없이 그냥 갔어? 전화해도 전화도 안 받고.”
“내가 애야? 그런 거 일일이 보고하게?”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는데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걱정 되는 게 당연, 지수야. 울어??”
주접스럽게 서러운 마음은 눈물로 자꾸만 승화됐다. 윤정한이 사준 연 파랑의 후드티 소매는 자꾸만 제 색을 잃고 진해져간다. 숨소리도 그와 더불어 격해져간다.
또 지수다. 지수.
취중진담에도 결국 변한 건 없었고, 우리는 결국 여기까지인 걸까. 보이지 않는 너와 나 사이의 경계선이 내 목을 감싸 쥐고 놓지 않아 답답함에 잘게 몸부림을 친다.
“홍지수,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울어?”
윤정한은 팔을 풀고 나를 돌려세웠다. 나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윤정한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돌아섰다.
“말해봐. 무슨 일 있었어?”
윤정한의 다정함은 지옥이었다.
“읽던 책이 슬퍼서.”
내가 자꾸 거짓말을 하게끔 만드니까.
“거짓말.”
“진짠데.”
극구 부인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너는 더 이상 내게 사실을 말할 것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대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너는 왜 이렇게 어렵냐.”
나는 그 말에 눈가에 올리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트린다.
어려워? 내가?
나는 네가 훨씬 더 어려워. 네 앞에서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티 한 번 낸 적 없고, 너에게 좋은 친구로 남으려고 늘 애썼는데도 너는 변함없이 한 발짝 물러서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니까.
말을 고르고 또 고른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해도, 또 반대로 너무 적게 말해도 답이 아니었다. 우리사이의 손익분기점을 찾아 목에서 응어리 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 말을 뱉는다.
“너는 내가 아직도 어렵니?”
“응. 어려워. 수능 때 봤던 수학 가형 삼십번 문제보다 니가 훨씬 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맞추며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너무 아파서 자꾸 눈물이 고였다. 입술이 질리도록 꽉 깨문다. 악을 쓰면 눈물이 다시 한 번 눈꼬리를 비집고 새어나오지는 않을 거 같아서. 흔들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햇수로 삼년을 봤는데도?”
“그러게.”
떨어지는 눈물과 작별인사는 않는다. 그저 떨어지도록 두었다. 너는 슬쩍 내 눈을 피했다. 그게 더 서러워서 나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필 시험이 끝나 버려서 도서관은 너무나 한산했고, 차가운 침묵의 시간은 내 바로 앞에 맞닿아 있어 나를 자꾸만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음이 한껏 시렵다.
“내가 네 선배야? 교수님이야? 내가 제일 편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다 빈말이었니?”
내가 하는 말들이 전부 너를 원망하는 것처럼 들려도, 사실은 하나의 날카로운 활이 되어 내 가슴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걸 너는 알까.
갑갑해져오는 가슴을 부여잡을 수가 없어서 손이 창백해지도록 꽉 쥔다. 그러나 갑작스런 온기가 내 볼을 감싸 안아 일순간 힘이 풀렸다.
살갗에 닿는 촉감만으로 윤정한, 너라는 걸 단 번에 인지한다.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너와 나만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 뺨에 닿은 손이 네 손이었으니까.
“우정으로는 편해.”
자꾸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너는 불만 없이 여러 번이고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훔쳐냈다. 여전히 네 다정함은 내게는 지옥이어서 볼이 불에 덴 듯 홧홧했다.
“어렵다며.”
너의 모순을 바로잡자 찰나의 침묵이 일었다. 너는 말을 고르는 듯했고, 나는 두려움에 말문이 막혔다.
대체 너는 무슨 말을 하려고, 내게….
“사랑으로는 어려워.”
침묵의 끝은,
“뭐…?”
어둠의 끝.
“내가 널 좋아하니까.”
나는 눈을 뜨고, 빛을 마주한다.
“그래서 다른 애들처럼 부르기 싫었어. 너는 나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니까.”
나는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실 나도 너를 좋아해?
너는 몰랐겠지만 첫눈에 반했어?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답을 기다리는 너에게 나는 말을 아낀다. 무턱대고 그의 손목을 잡고 도서실 안으로 들어간다.
벽과 벽이 맞닿아있는 구석으로.
책꽂이에 책이 빽빽이 들어서 책의 향이 넘실거리며 우리를 가려주는 곳으로.
그곳에서 고요히 미소 지으며 아주 작게 너에게 말한다.
“‘야’해.”
윤정한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늘 놀림당하는 쪽은 나였는데, 그가 당황하는 모습이 어찌나 재밌던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큭큭- 작게 웃고서는 재차 말한다.
“‘야’, 해달라고.”
“아-.”
여전히 의문을 품은 표정을 짓는 너를 보며 양 팔을 네 목에 건다. 그리고 눈꼬리를 접는다. 견고한 시선으로 너를 꿰뚫으며 속삭인다.
“네가 나를 감히 ‘야’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이 될 테니까.”
“지수야 그…!”
“쓰읍-”
짐짓 삐친 표정을 지으니 안절부절 못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자칫 웃음이 새어나갈 뻔 했다. 결국 지는 쪽은 덜 견고한 쪽. 너는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음절을 내 뱉는다.
“야.”
“응.”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쉬운 말을, 너무 쉬워서 이토록 허무한 단어 하나를 듣기 위해 지난날, 어찌나 고군분투 했던지.
“홍지수.”
“응, 정한아.”
표정을 풀고 싱긋 웃으며 대답 했더니 너도 따라서 배시시 웃는다. 웃는 너의 얼굴에서, 아득히 지나가버린 과거의 잔상이 또렷이 보였다.
우연히 동아리 부스를 맡게 된 너.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나.
우연히 대면했던 우리.
서로를 놓치기 싫어 붙잡던 그 때, 그 날.
그리고 지금.
“지수야.”
여전히 나는 네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너는 한층 내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정말 아차 하면 코가 닿을 듯 했다.
“왜, 정한아?”
도발
“키스하고 싶어.”
사살.
“너랑.”
확인 사살.
정정한다.
야한 남자.
윤정한의 별명이었다. 자신과 조금 친하다 싶은 사람들을 부를 때 지칭하는 용어가 ‘야’로 통일 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해도 돼?”
고백한 날부터 입맞춤을 원하는 변태적인 마인드와, 사람을 홀리는 섹시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 제대로 넘어간 나는,
“윤정한, 정말 야해. 너.”
뜨거운 침묵 속으로 너와 함께 빠져 들어간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