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비가
월야
나에겐 비가 오면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비가 올 때면 다른 소리들은 일절 들리지 않았고
그 목소리만 내 귀에서 들렸다.
처음 귀가 들리지 않은 건 21살 때 였다.
비가 왔고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병원도 가봤지만, 귀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느리게
비가 올 때만 들리는 알 수 없는 이의 목소리에 익숙해져 갔다.
거의 4년간 비가 올 때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알고 싶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인
‘홍지수’라는 남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25살의 나와 동갑의 대학생인 것 같았고,
친구들은 많았지만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홍지수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난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지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트북으로 글을 쓰곤 했다.
간혹 지수의 질문에는 답변을 하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되니 지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내가 비가 오면 본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도 모를 지수였지만 그냥 지수가 좋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은 불시에 찾아오게 되었다.
그날도 조용했던 아침이었고, 거실을 나와 밖을 보니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수는 아직 자는 중인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기분은
비가 오는 날이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혼자 간단히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자연스럽게 거실로 가 노트북을 켰다.
그렇게 글을 천천히 써내려가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잠이 들었는지 몰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대고 있던 소파에 거의 눕듯이 해 자고 있었다.
뻐근한 몸을 펴며 창밖을 확인하자 아직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켜 시간을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그다지 배는 고프지 않아 밥은 따로 먹지 않고
어느새 절전상태가 돼서는 화면이 꺼져버린 노트북의 화면을 켰다.
그때 귓가에 지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제발ㅋㅋㅋ 최승철..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ㅋㅋㅋㅋ”
지수는 친구로 생각되는 최승철이라는 사람과 만난 듯 보였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런 지수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타이핑을 하던 중 웃던 지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덜컥 멈췄다.
비가 그쳤나 했지만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수의 말은
“승철아.. 나 소리가 안 들려”
였다.
지수는 당황했는지 웅얼웅얼 말을 내뱉었다.
앞에서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 지수는 안 들린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잠시 후 지수는 결국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끝없이 말을 하던 지수가 결국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왜...왜, 안 들리는..거야...흐윽...”
울먹이는 지수의 목소리에 갑자기 지수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훌쩍이는 지수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으로 목을 살짝 가다듬고 안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기...지수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지수는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놀란듯했다.
“ㄴ..누구세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거리던 찰나 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야... 설마 당신이..제 귀 안 들리게..하신거에요??!”
“아니..그게 아니고요.. 일단.. 저는 25살 작가 윤정한이라고 합니다. 지수씨 진짜 못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제가 4년 전부터 비가 오면 아무 소리도 안 들렸고, 지수 씨가 어디에 있든 지수씨 목소리만 들렸어요. 아마 지수씨도...이제서야 제 목소리가 들리게 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내 얘기를 듣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조용하던 지수가 갑자기 나에게 오늘 저녁에 만날 수 없겠느냐며 물어왔고 나는 덜컥 그러자고 해버렸다. 생각보다 지수와 내가 가까이 살았기도 했고 지수를.. 실제로 보고 싶어서였다.
시간이 지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지수와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각이었고
만나기로 한 곳은 지수와 내가 사는 곳 사이에 있는 작은 개인 카페였다.
약속 시각보다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 내가 마실 음료를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중 10분 정도 지났을까 딸랑하고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고 오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나에게 다가왔다.
“저기 혹시 윤정한씨?”
목소리만으로 난 그가 홍지수인걸 알 수 있었다.
“아, 네 맞아요. 지수씨..맞으시죠?”
“네. 아까 하신 말씀들 다시 설명 좀 해주세요. 저 지금은 다 들리거든요?”
“저도..마찬가지에요. 지금은 다 들려요. 비가 오면 서로의 목소리만 들리는 거라서요..”
“아니..그게 무슨.. 그럼 윤정한씨는 지금까지 4년 동안 제 목소리 몰래 듣고 계셨던 거네요??! ”
“몰래 들은 게 아니라 들렸던 ㄱ,”
갑자기 내 뺨 위로 매섭게 날아든 손바닥과 뺨과 마찰하여 난 큰소리와 함께 카페에 있던 몇 안 되던 사람들의 눈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지수를 보자 지수는 벌떡 일어난 채로 손을 들고 있었다.
“진짜 변태 아니야?!? 아니.. 됐고 다시는 제 목소리 훔쳐 듣지 마요!!”
화를 버럭 내고는 카페를 나가버리는 지수였다.
지수에게 맞은 뺨이 그제야 화끈거리며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야 카페 문을 나서는데 괜히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인 느낌이라 눈물이 났다.
집으로 가면서 눈물을 벅벅 닦아내는데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이 손등에 닿았고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야만 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해야만 했다.
집으로 가자마자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자 머리가 깨질 것 처럼 아파왔다.
대강 손을 뻗어 이마를 짚자 후끈함이 몰려왔다.
어제 추운 날씨에 겨울비를 맞은 것이
원인이 된 듯했다
어제 입고잔 축축한 옷을 벗어서 침대 밑으로 떨어트리고 그나마 마른 흰 티 하나만 입고 잠에 빨려 들어갔다.
‘쾅쾅쾅쾅, 저기요!’
누군가 문을 부술 듯이 두들기는 바람에 잠에서 깬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하아, 윤정한씨. 괜찮아요? 어어, 윤정한씨!!”
정신을 차리고 나니 지수씨가 내 침대 한켠을 기대어 엎드려있었다.
“지, 지수씨.. 일어나봐요.. 왜.. 여기 있어요..”
고개를 든 지수씨의 눈이 붉었다.
“아픈데 왜 말도 안 해요! 비는 오는데 윤정한씨 기침 소리며, 콜록대는 소리는 다 들리고 어제 비 맞고 간 게 뻔한데! 왜, 얘기 안했냐구요!! ”
지수씨의 말에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보니 12월 30일.
“지수씨. 어제도 승철씨랑 얘기하는 거 엿들은 거 미안한데.. 오늘, 생일 축하해요. 매년 들었어요.. 오늘 생일이라고.. 생일인데 나 걱정해주고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앞으로는 지수씨 말 안 들으려고 노력해볼게요. 근데 이거 하나만 기억해줘요. 지난 4년간의 비 오는 날들은 항상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순간들이고 기억들이었다는 거.”
생일 얘기부터 울먹거리던 지수 씨가 마지막 말엔 결국 눈물을 터트리며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는 나에게 푹 안겼다.
“지수씨, 감기 옮아요.”
“상관없어요.. 흐윽, 미안해요 정, 한씨.. 제 말 다 엿들어도 돼요.. 흑..”
“괜찮아요. 지수씨가 제 마음 받아준 것만으로 저는 좋아요. 고마워요 지수씨”
그렇게 지금 홍지수와 나는 그 후로 연애를 이어나가고 있,
“뭐해 정하나?”
“우리 얘기 쓰는 중이지~ 쓰다 보니까 생각난 건데 너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그때?”
“아.. 내 친구가 니 친구더라고...ㅎ”
“아~, 맨날 맨날 비 왔으면 좋겠다. 홍지수 목소리만 듣게..”
“뭐야~ 변태~~”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생각 했어 홍지수~”
연애를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