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開花)
作. 화월
“ 소문 들었습니까? ”
“ 무슨 소문 말이오? ”
“ 글쎄 세자가 말이오, 새벽만 되면 동궁전에서 남색을 즐긴다하오. ”
“ 무어라? 무슨 말도 안 되는- ”
요즈음처럼 이렇게 동궁전의 신하들이 시끄러운 적이 없었다. 동궁전 뿐만 아니라 궐내에 소문이 돌았다. 평소 행실이 올바르고 학업에만 몰두하던- 나무랄데 없이 커 어릴 적부터 세자로서 책 잡힐 것 하나 없이 추대받던 세자가 새벽만 되면 남색을 즐긴다고 말이다. 물론 소문에 그쳤지만 말이다. 하지만 동궁전 내에서는 여전히 세자가 남색을 즐긴다는 말이 떠돌았고, 하지만 이내 아침이 되거나 낮에 세자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질 정도였으니, 신하들은 골치가 아프면서도 숨기기 급급했다. 동궁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물어볼 적에는 그저 아니라며 발뺌하기 바빴으니 말이다. 역시나 발뺌하고 나면 신하들은 대답했다. 역시, 세자같이 곱디 곱게 자라고 어진사람이 그럴리 없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세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속을 모를 노릇이었다.
“ 저하, 익위사(조선시대 동궁의 호위를 맡던 기관)의 호위무사 윤 씨가 들었습니다. 들라할까요? ”
“ 들라하라. ”
세자가 책을 읽으며 말했다. 세자는 눈, 코, 입 할 것 없이 이목구비도 뚜렷했으며 아비와 닮은 곳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굉장히 외모가 빼어났다. 그런데 그 외모가 빼어난 세자가 활을 쏘는 솜씨도 늘 장했으며, 칼을 다루는 솜씨도 제법 있었으며 학문적으로 몹시 뛰어나니 형제들의 질투도 많이 받아 세 번째 왕자의 난이 일어날 법도 했지만 관리들의 추대로 인해 왕자의 난이 시작되려는 징조는 사그라졌고 세자도 그에 대비하여 많은 준비를 했기에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능했다고 많은 관리들과 신하들이 보고 있었다.
익위사의 호위무사인 정한은 15세부터 세자의 곁을 지켜왔던 오랜 벗과 같은 사람이었다. 세자에게 꽤나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익위사에서의 대우도 어느 정도 좋았으며, 심지어는 임금이 그를 꽤 아끼고 있다 하여 많은 이들이 부러워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관리는 세자가 정한을 들라하라는 말에 나가보았다. 관리가 나가자 세자는 살짝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 저하, 들어갑니다. ”
밖에서 들려오는 정한의 목소리에 세자가 읽던 책에서 눈을 떼어 문을 조심히 열어 들어오는 정한을 바라본다. 정한은 사교성이 좋아 동궁전의 내시들과도 친밀했으며 익위사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는 칼을 쓰는 모습이 출중하여 사법기관인 의금부에서 그를 데려가려 익위사와 임금과 동궁전에 많은 요청을 보냈지만 그때마다 세자는 안 된다며 익위사와 임금을 설득해 정한을 자신의 옆에 두고자 하였다. 임금도 세자의 마음을 헤아려 그리 해주었고 덕분에 정한은 편하게 세자의 옆에서 지금까지 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아니 어쩌면 알지도 모르지만 증거가 없어 확신을 못하는 둘만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소문대로 세자는 남색을 즐기는데 그것은 호위무사인 정한과 함께였다. 앞으로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정한을 방으로 들일 때마다 정한과 함께 있기를 즐겼으며 그를 연모(戀慕)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세자뿐만이 아닌 정한도 마찬가지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 소문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
“ 괜찮다- 혹,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사실인데 별 수 있겠느냐? ”
“ 정말 이럴 때 보면 사람 참 모르는 것 같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대체- ”
정한이 웃으며 말하는 것에 지수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산책이 가고 싶어졌다며 동행해 달라 말하자 알았다며 관리를 들여 지수의 곤룡포를 입는 것을 도와주게 했다. 정한은 멀리서 지수를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를 보면서 어쩌면 정한은 지금 당장 가서 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수는 관리의 손을 따르다 정한의 얼굴이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에 살짝 바라보니 정한이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는 것에 정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든 정한이 지수와 눈이 마주치자 한껏 웃어보였다. “저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관리의 걱정스런 말투에 지수가 그제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목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들 사이에 미묘한 감정, 멀지만 가까워 보이는 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을 비추어주고 있는 듯하니, 그것은 마치 달이 강을 비추어주고 있는 듯 그래서 강가에 가면 보름달이 환하게 보이는 것마냥, 그래서 달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들은 가까워보였다.
“ 오월(五月)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목련이 피어있구나 ”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말하는 지수의 말에 정한이 뒤에서 지켜보자 지수가 뒤를 돌아보며 정한을 불렀다. 정한이 지수의 옆으로 가자 뒤따르던 관리들과 궁녀들이 조심히 뒤로 물러섰다. 계속해서 목련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정한이 지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 혹, 목련의 꽃말을 아십니까? ”
“ 목련? 저번에 마마가 말씀해주신 것 같기도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
“ 고귀함입니다. 고귀함. ”
“ 고귀함이라……. ”
정한이 말하는 것에 지수가 목련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정한이 이제 그만 둘러보고 그만 들어가자는 말에 지수는 싫은 듯 했다. “조금만 더 둘러보다 가자. 날씨가 좋아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참 좋아서 그렇다.” 지수의 말에 정한은 살짝 미소를 내보이더니 알았다며 지수의 옆에 붙어 그와 함께 걷는다.
“ 고귀함, 마치 너 같구나. ”
“ 예? ”
“ 너 말이다 정한아. 나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값비싸고, 귀한 사람이라서, 목련 같다고. ”
지수가 말하는 것에 정한이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저하, 그런 말하시기 안 부끄럽습니까?” 정한이 묻는 것에 지수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정한을 보더니 헛기침을 하고서는 다시 앞을 바라본다. 정한이 그런 지수가 마치 아직 어린아이 같아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뒤에서 따라오는 관리들과 궁녀들은 곧 임금과 관리들의 귀와 입이 되는 자들이다. 그래서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했기 때문에 산책을 할 때에도 둘만의 시간을 갖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날씨가 좋아서일까. 지수가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였다.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정한을 알게 된 것은 지수는 늘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외로울 줄로만 알았던 길 위에 서서 정한을 만나게 된 것은 어둠속에서 길을 헤매다 빛을 만났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에 지수에게 정한은 한없이 소중하고도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곧 쌀쌀 해 질 것 같습니다. ”
“ 그래, 그럼 ”
들어가자는 말에 지수는 흔쾌히 알겠다며 이야기 하자 정한이 뒤에 있는 신하들과 궁녀들에게 들어간다는 신호를 보내자 재빨리 뒤로 붙어 지수를 따라갔다. 동궁전으로 돌아 온 지수와 정한은 활을 쏘는 수업이 있어 준비를 해야 했다. 지수에게 활 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다름아닌 정한이었다. 어릴적부터 활쏘는 실력이 남달라 정한은 일찍이부터 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한의 아버지가 높은 직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의 활 쏘는 능력은 옛 주몽을 닮았다 할 정도로 출중했다. 본래는 정한에게 맡기지 않았지만 지수가 청했고, 이후 정한은 지수의 활 스승이 되기도 했다. 벗이자, 스승이자, 호위무사이자, 때로는 정인(情人) 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냥 정인(情人)이라는 단어가 그들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돌아 온 후 지수는 다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동안에 정한은 밖으로 나가 활쏘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수가 바깥으로 나오자 정한이 뒤에 있는 신하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자 신하가 물러났다. 조용한 곳에서, 단 둘만 남은 마당. 미묘한 감정 선이 그들에게서 느껴졌다.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 궁내에 이상한 소문이 허다하게 퍼지고 있다 하던데, 사실입니까? ”
정한이 뒤에서 그를 안 듯이 지수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물었다. 지수는 뒤에서 느껴지는 정한의 온기에 몸이 정지되었다. “큰 소문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지수의 말에 정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세 교정을 마친 뒤 정한이 그제야 지수에게서 조금 떨어져 지수에게 활을 쏘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수는 아까 그가 자신을 안 듯이 뒤에서 자신을 감쌌던 것을 생각하니 괜히 집중이 잘 되지가 않았는지 활을 쏘니 엄한 곳으로 화살이 날아가 버려 당황했다.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정한이 지수의 옆으로 다가가니 지수가 움찔 했다. ‘또-’ 그들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애타는 것은 지수였음을 정한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정한은 그런 지수의 애탐을, 혹은 떨림을 지켜보며 희열을 느꼈을지도-
“ 집중을 못하십니까?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
“ 아니- 아니다……. ”
지수는 몰라서 묻는 건가 싶다가도 자신을 능욕하려 하는 것인가 싶어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정한에 대한 생각이 떠나가지 않았다. 옆에 있는데도 자꾸만 이렇게 생각이 나면 어쩌자는 건가 싶었다.
“ 그런데 만일- 저하와 제가 그렇고 그런, 그러니까, 저하와 저의 관계가 정말 낱낱이 다 밝혀지면 어찌됩니까? ”
“ ……. 내가 막을 것이다. 너를 혼자 두는 일을 없을 것이다. ”
지수의 단호한 말에 정한은 지수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바라보느냐……. ” 지수의 말에 정한은 아니라며 활을 쏘라며 다시 신호를 보내자 지수가 다시 감을 잡고 집중했다.
명중이었다. 정한이 뒤에서 웃어보였다. 지수가 보기 전에 다시 표정관리를 하며 뒤에서 박수를 치는 정한이다. 지수는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 정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땀을 닦아냈다.
지수가 활을 쏘는 것이 한창일 때 멀리서 신하 한명이 다가왔다. 정한이 무슨 일이냐며 그 신하를 바라보자 전하의 부름이 있다며 가보아야 할 것 같다는 말에 정한이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도 그 말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바라보았다. 정한이 지수와 눈을 한번 마주치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뒤돌아 신하를 뒤따라갔다.
“ 전하, 호위무사 윤씨- ”
“ 들라하라 ”
임금은 급한 듯 신하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정한이라는 것만 인지한 뒤 들여보내게끔 만들었다. 임금과 자주는 아니어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한적이야 많았지만 이렇게 단 둘이, 임금의 방 안에서는 처음이었다. 정한은 혹 지수와 자신의 관계가 들킨 것일까 살짝 두려웠다. 자신이 당하게 될 일 보다는 훗날 지수의 미래가 사라질까봐, 이대로 쭉 올라가 지수는 자신의 자리에 당당히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수의 곤룡포가 붉은색(세자의 곤룡포는 푸른색이다)으로 바뀌기를 정한도 진심으로 원했다. 정한의 심장이 더욱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혹,” 임금의 입이 열렸고 정한의 심장이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 요즈음 들리는 세자에 대한 소문을 아는가? ”
“ 예……. 듣기는 했습니다만- ”
“ 그래- 네가 지수의 옆에 있게 된지도 이제 꽤 되지 않았느냐, 벗처럼 지내와 가장 함께 오래 있으니 알 것 같아 불렀다.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같느냐? ”
곤란한 질문이었다. 임금은 당연히 정한이라는 것을 배제한 뒤 정한에게 질문한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소문의 당사자에게 소문에 대해 진실인지 묻는 것인데- 정한은 두렵기도 했지만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절대, 절대로 지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괜찮아도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한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대답한다.
“ 이제까지 어릴 때부터 하나도 나무랄 데 없이 자라지 않았습니까? 형제들의 질투심을 많이 받고 있는 저하입니다. 이런 말씀 올려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혹, 그 형제들 또는 그의 신하들이 거짓 소문을 낸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갑니다. ”
정한은 재빠르게 생각해낸 거짓말거리를 임금에게 말하고 임금을 슬쩍 보았다. 임금은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고민에 잔뜩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한은 그의 형제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가장 그러려니 한 변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형제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하다가도 그러니 평소에 지수를 괴롭히지 말았어야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그래, 내 세자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궐내에 세자에 대한 안좋은 소문이 나봤자 좋은 것은 없지 않겠느냐. 네 말대로 세자 책봉이 되기 전부터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던 세자에 대한 거짓 소문이 나면 훗날 임금의 자리에 앉을 때 악이 되지 않을까 싶어 확인하려 불러보았다. ”
임금의 말에 정한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을 나서며 정한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다시 동궁전으로 향해야 했다. 지수가 걱정할 것이니 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걸음이 조금 빨라진 정한이었다. 동궁전에 거의 다다랐을 때 멀찍이 서서 활쏘기에 집중하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정자세로 서서 활을 쏘고 있는 지수의 모습은 제법 그럴싸해보였다.
정한이 웃으며 지수의 옆으로 다가가니 지수가 정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자신을 너무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지수에 정한이 입모양으로 말한다. ‘뒤에 신하들도 있는데-’ 지수는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이내 이해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한참을 활쏘기에 집중을 한 뒤 지수는 다시 동궁전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정한은 그의 뒤에 붙어 따라간다. 침소에 먼저 들어간 지수에 신하들이 뒤로 물러나 문을 닫는다.
“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를 한거야? ”
“ 그냥, 저하 좀 잘 봐달라고 하셨습니다. ”
“ 음- 아닌 것 같은데. ”
눈치 빠른 지수가 정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야기 하자 정한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정한의 반응에 지수가 갑자기 이불 위에 털썩 앉는다. 당황한 정한이 일어나라며 조용히 이야기하자 지수가 고개를 젓는다.
“ ……후에 또 공부 하러 가야하지 않습니까? ”
“ 해야 하는데……. 네가 있어서 가기 싫구나. ”
이불에 가만히 앉아 지수가 갑자기 자신의 옆을 손으로 툭툭 치니 정한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 여봐라 누구 있느냐-! ”
고개를 젓는 정한에 갑자기 지수가 큰 소리로 밖의 신하들을 찾는다. 당황한 정한이 정자세로 서서 정면을 주시한다. 그런 정한이 웃긴지 지수가 피식 웃는다. 이내 지수의 소리를 듣고 신하 몇 명이 문을 연다.
“ 부르셨습니까. 저하- ”
“ 이 자가 동궁을 지킬 터이니 다들 잠시 바람좀 쐬고 오거라. 곧 내 경전을 읽을 시간이니 다들 잠시 나갔다 오거라. 후에 또 내내 서있어야 하지 않느냐. ”
“ 허나 저하- ”
“ 괜찮다해도. 나가 보거라 다들 ”
“ ……허나, 동궁전 밖을 벗어나진 못하옵니다. 전하께서 아시면 심히 노하시니, 앞마당에 있겠으니 필요할 때 불러주십시오. ”
신하의 말에 지수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신하들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한은 또 한 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다들 완벽히 나간 것을 눈치챘다. 지수의 말도 안되는 이 행동에 정한은 어이가 없는 듯 했다. 헛웃음을 지어보이는 정한에 지수가 정한을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정한은 아까 지수가 옆에 앉으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인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고 지수의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자신의 옆에 앉은 정한에 지수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 뭐하시는 겁니까? ”
“ 오늘따라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
눈을 가늘게 뜨며 지수가 앙탈을 부리듯 이야기하자 정한이 웃고 싶은 것을 참고 지수의 눈을 응시한다.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하자 정한이 고개를 돌려 헛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못 참겠다는 듯 살며시 지수의 목언저리에 손을 올린 뒤 고개를 꺾어 지수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두사람의 몸이 맞부딪혀, 두 사람의 온기가 뒤섞여 방을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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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전 한 쪽에는 오월(五月)만 되면 모란이 개화(開花)한다. 모란꽃이 동궁전에 모란꽃이 많이 심어져 있는 이유는 모란의 의미 때문이다. 모란꽃의 의미는 부귀(富貴), 영화(榮華), 왕자(王子)의 품격(品格) 이 외에 한 가지 더, 행복(幸福)한 결혼(結婚)이 있다. 세자가 머무는 동궁전에 모란꽃이 군데군데 많이 심어져 있는 이유는 이 4가지면 충분하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왕자의 품격을 지키며, 자신을 내조해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궐에, 나라에 누가 되지 않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 그것이 모란꽃이 동궁전에 존재하는 이유다. 지수 역시 세자로 책봉이 된 이후에 동궁전에 들어오게 되면서 망연스럽게 모란꽃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모란꽃은 어쩌면 세자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산책을 나와 있던 지수는 아직 개화(開花) 하기 직전으로 보이는 모란꽃을 발견하고는 한참을 그 꽃을 바라보고 서있다. “오늘이 오월… 며칠이더냐?” 지수의 물음에 뒤에 있던 내시가 조심스레 대답한다. “오월(五月) 초엿새(6일)입니다” 보통 모란꽃의 개화시기는 오월(五月)이니 지금 개화(開花) 하는 것이 맞겠구나.
지수가 한참 모란꽃을 보고 있을 때에 익위사에 훈련이 있어 늦은 정한이 이제막 동궁전에 발을 딛는다. 들어오는 정한을 보던 지수가 모란꽃을 지그시 바라본다. “모란의 꽃말에는 행복(幸福)한 결혼(結婚)이 있다지?” 지수의 말에 내시가 그렇다며 대답한다. 지수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수는 혼인 할 마음이 없다. 당연하게도 정한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니라. 지수는 앞으로도 혼인 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한 나라의 세자가 되었을 때에는 그런 것 따위는 지수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지수는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 곧 세자빈 간택이 있을 터이니 영상은 간택할만한 여인들을 올려주시오. ”
세자빈 간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보통 오월(五月)이 되면 세자빈 간택을 시작해 교육을 마친 뒤 가례(嘉禮)를 거행한다. 그 사실을 들은 지수는 기분이 영 좋지만은 않다. 아무리 마음에 없는 여인을 만난다 하여도 혼인을 하게 되면 홀몸이 아니다. 유교적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면 왕실이 뒤집힐 것이다. 지수는 이 압박감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정한이 이 사실을 알면 자신을 떠나게 될까봐 정한과 더는 얼굴을 마주볼 수 없게 될까봐 아마 그것이 지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다.
“ 저하, 정한이옵니다. ”
“ 들어오거라. ”
지수는 정한이 조용히 들어오자 아무렇지 않은 척 경전을 마저 읽는다. 그런 지수를 보며 정한이 옆에 앉는다. 칼을 조심히 내려놓고 무릎위에 두 손을 올린채로 정한은 지수를 응시한다.
“ 어찌 그리 보느냐? ”
“ 세자빈 간택이……. 이루어진다 하여……. ”
“ ……. ”
당연히 알게 될 일이었고,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정한이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수는 이제 정한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두가지라고 생각했다. 궐을 떠날 것이다. 혹은 의금부로 옮겨 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지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한이 자신의 곁을 떠나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다.
반대로 정한의 속내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든 지수의 곁에, 지수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수가 세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이상 세자빈 간택, 그리고 가례(嘉禮)를 거행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세자빈 간택을 미룰 수는 있다. 허나,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법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엄격한 이 궐에서 지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이토록 순종적이고도 행실과 언사를 주의해야만 한다. 정한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지수를 잃기 싫다. 지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싶을 정도로, 지수를 잃고 싶지 않다.
“ 내가 만일 혼인하게 되더라도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지금과 같을 것이야. 언제나. ”
“ 하지만, 혼인을 하게 되면- ”
“ 정한아- ”
“ 저하의 곁에 계속 있고 싶은데, 어렵습니다. 저는 있는 집의 자제도 아니고, 뛰어난 머리를 가진 학자도 아니며 관직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전하와 저하가 저를 좋게 봐주시고 예뻐해 주시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칼이나 휘두르는 무신에 불과합니다. 저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욕심은 어떻게 할 수 없나봅니다. 저하를 놓치기가, 잃기가 죽기보다 싫습니다. 어찌해야합니까? ”
정한의 이런 진심어린 말은 처음이었다. 마치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어린 아이가 하는 고백(告白) 같았다. 꾸밈도 없으며, 거짓이 없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지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지수는 할 말이 없었다. 정한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지-
“ 제 욕심 때문에 저하를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저하의 옆에 계속 있고 싶습니다. 가례(嘉禮)를 올린 뒤 빈궁(嬪宮)이 들어온다 하여도, 저 역시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하와 저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하여……. 정녕, 그저 저하와 제가 평생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리라 믿습니까? ”
정한은 하고 싶은 말이 쌓인 듯 목구멍에서 많은 말들이 뒤섞여 뱉어내지 못하고 있는 말들이 쌓여 있었다. 화가 난 것만 같은 정한의 얼굴에 지수는 할 말이 없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정한의 얼굴을 보고 해줄 수 있는 말은 ‘괜찮다’는 말 밖에는 없었다. 사실 자신도 괜찮지 않다. 도망가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어쩌다 자신은 왕실에 태어나 정한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며, 어쩌다 세자에 간택되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토록 힘들게 하고 있나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한은 할 말이 끝난 듯 방을 빠져나간다.
“ 내가 세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결국 나와 저 아이의 발목을 붙잡는 다라……. ”
지수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정한이 나간 뒤에 경전을 덮고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두가지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 지수는 답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늘 그렇듯 답을 알면서 그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나 다름없다. 정한과 그간 있던 모든 행복한 순간들을 일장춘몽(一場春夢)따위로 끝내지 않으려면 결단(決斷)이 필요했다.
“ 사사무성(事事無成)과 같은 결말(結末)은 없어야 할 터인데……. ”
이 길고도 긴 하루가 빨리 막이 내렸으면 싶었다. 길고도 긴 이 인생길에서 정한을 만나게 됐던 순간만큼은 늘 행복했고, 사라져서는 안될 소중한 기억들이다. 잃고 싶지 않다. 정한이 가슴에 비수를 꽂고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이 저녁은 지수에게 너무나도 길고, 고통스럽다.
“ 본래 이 궐에 태어난 세자, 임금은……. 만목소연(滿目蕭然) 할 것이다 하였는데, 스승이 말씀해주신 그대로구나……. 정한이 떠나가니 나뿐만 아니라 저 밖에 있는 모란도, 그리 아름답던 목련 마저도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구나, 저물어간다. 시들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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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익위사를 깨우는 소리가 시끄럽다. 의금부와 익위사가 모여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세자가 사라졌다.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지수의 최측근에 배치되어 있는 호위무사는 정한이다. 당연히 정한에게 모든 책임이 쏠렸으며 정한의 손이 벌벌 떨렸다.
‘ 내, 내가 어제 저하를 힘들게 해서- 그랬기에……. ’
정한은 믿을 수 없었다. 지수가 하룻밤 사이에 이 넓은 궐에서 혼자 어디로 도망쳤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뿔뿔이 흩어져 지수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절대로 밖으로 세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돌아서는 안되었다. 익위사와 의금부만 알아야 했다. 임금은 애가 탔다. 만일 세자가 죽기라도 한 것이라면, 암살이라도 당한것이라면, 납치라도 당한 것이라면……. 세자 책봉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수의 형제들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수만한 세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수가 사라진 것이 맞다면 임금은 질타(叱咤)를 받을 것이다 지수의 형제들에게 질타(叱咤)를 받을 것이다. 이럴 줄 모르고 지수를 책봉한 것이냐며, 질타(叱咤) 받을 것이다.
궐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지수의 흔적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궁녀들은 동궁전 내부를 여기저기 다 뒤져보았지만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의금부와 익위사의 관리들은 모두 밖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정한은 궐 주변을 발로 뛰며 지수를 찾아야만 했다. 지수의 성격에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갔을 리는 없다. 정한은 궐 뒤에 보이는 산을 또렷이 바라본다.
[ 도망갈까- ]
[ 저하? ]
[ 저 뒷산에 무엇이 있는지 아느냐? ]
[ 모르옵니다 ]
[ 그냥, 길. 다른 길이 있더구나 ]
[ 어찌 아셨습니까? ]
[ 예전에 몰래 뒷산에 가서 많이 울었거든. 아무도 오지 않아서. 가끔 몰래 올라가고는 했지. 그리고 해가 저물기 전에 조용히 들어오고, 이 담장만 넘어가면 뒷산이거든. ]
뒷산을 바라보다 정한은 옛적에 지수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저 곳이야. 정한은 혹여 다른 이들이 쫓아올까 싶어 빠르게 산으로 향한다. 처음 와보는 곳, 그리고 경사가 꽤 높다. 이 곳을 매번 혼자 오르락내리락 했던 것일까. 정한은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흐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멈출줄 몰랐다. 산은 꽤나 높았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야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아름다운 숲속이 나온다. 조금 더 올라가니 초록빛을 띄고 있는 길이 보인다. 정한이 숨을 몰아쉬며 그 길 위에 우뚝 선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지수는 보이지 않는다. 정한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걷는다. 그때 뒤에서 오싹한 느낌이 든다. 뒤에 누군가가 있다. 놀란 정한이 허리춤에 있는 칼을 빼어내려하자 조용히 뒤에서 누군가 정한의 손을 잡는다.
“ 나구나. ”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온기. 지수이다. 정한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앞에 지수가 서 있다. 놀란 정한이 두 눈을 크게 뜬다. “쉿” 지수가 웃으며 정한의 입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는다. 정한은 이것이 정말 생시인가 싶어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
“ 찾아주었구나. ”
“ 저하- ”
“ 도망갈까 ”
전과 같은 말이다. 그때에도 “도망갈까-” 하였다. 이번에도 도망치고 싶어 한다. 정한에게 선택권은 없다. 지수를 데리고 도망가야만 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 평생 함께하고 싶으니.
“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일각삼추(一刻三秋) 하여 내 아주 미치겠더구나. ”
“ 저하, ”
“ 저하가 아니라, 이제 손을 맞잡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인연이 아니겠느냐. ”
“ 하지만- ”
“ 불러줘, 내 이름 ”
간절한 듯 지수가 말한다. 정한이 지수에게 다가가 지수의 손을 맞잡는다. 두 사람만 있는 듯한 이 길 위에는 어쩐지 밝게 빛나는 탈출구가 있는 것만 같다. 비록, 힘든 길이 될 수 있다. 이 외딴길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놓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은 서로를 혼자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영원히 도망갈 것이다.
“ 연모해왔고, 앞으로도 그리 할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다. 지수야, 지수야. ”
정한이 웃으며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달고도 묘한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무엇인가 있는 것만 같았다. 지수는 웃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힘들었다. 둘은 한참을 서로의 손을 맞잡고 마주보았다. 자신들만의 낙원(樂園)으로 떠날 채비를 끝낸 모양이다. 그들 양 옆에 하나 둘 씩 피어나기 시작하는 ‘모란’이 밝게 빛난다. 그들의 새로운 오월(五月)이 그들을 비춰준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