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 레니
몇달전부터 윤정한의 취미는 일기쓰기였다. 누구나 새해가 되기전에 하나씩 구매한 뒤 빠르면 한달, 오래가면 세네달쯤 쓰고 집 어딘가에 묵히게 되는 다이어리. 그건 정한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일정만 간단히 써놓고 어딘가에 꽂아두었던 다이어리를 찾느라 정한은 한시간동안 책장을 뒤졌다. 중학교때 만들었던 어버이날 편지까지 발굴해내고 나서야 겨우 찾은 네이비색 양장 다이어리를 툭툭 털고 펼치자 얇게 덮여있던 먼지가 날려 코를 간지럽혔다. 그러나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날 당시의 날짜부분을 펼쳤다. 윤정한이 세달만에 다이어리를 찾아 심오한 표정으로 처음 쓴 말은 이거였다.
‘나는 홍지수를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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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의 고등학교 1학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적은 항상 중상위권을 유지하였고, 상장도 적당히 받았고, 친구도 적당히 사귀면서 무난한 학교생활을 보냈다. 무료했음에도 빠르게 지나간 시간에 정한은 반가워하였다. 앞으로 2년 또한 그렇게 보낼 작정이었다. 봄방학이 지나 새로 나뉘어진 반에 가면서도 정한은 적당히 열의있고 적당히 공부하는 아이들을 만나기를 속으로 빌었다. 정한은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필요할때는 가능성을 넓히기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종종 그 가능성은 이루어졌다. 이번에도 그러하였다고 생각했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구려보이는 카키색 스웨터를 입은 선생님이 자신을 새로운 담임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수학선생님. 다행히도 정한의 성적이 가장 좋은 과목이었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는 무심한 눈길로 짧게 관찰하였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애들도 종종 있었고, 우등생인 듯 똑 부러지게 자신을 말하는 애도 있었다. 이따금 날티나는 애들도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정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교탁으로 나와 짤막하게 말하고 바로 들어갔다. 아.. 네 저는 윤정한이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소 성의가 없는 자기소개였음에도 선생이 자신을 좋게 보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정한은 자신의 얼굴이 먹혔다고 지레짐작 하였다.
정한은 자신의 출석번호가 왜 뒤에서 두 번째인가에 의문을 가졌었고, 그 해답은 자신 바로 뒤에 불린 이의 이름을 통해서 해결되었다. 홍지수. 선생님이 걸걸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구석에 앉아있던 학생이 일어나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정한은 눈을 거의 덮을만큼의 앞머리를 지닌 홍지수라는 아이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힙찔이인가? 선생님은 올해 전학 온 학생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정한이 힙찔이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다. 나는 홍지수라고해. 의외였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정한은 이내 엎드려 잠을 청하였다. 종이 치기까지 1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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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야자를 하지는 않았지만 성적이 잘 나왔다는 이유로 독서실처럼 칸이 있는 곳에서 야자를 하게 된 정한은 야자의 절반을 잠이나 폰으로 시간을 때웠다.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할 일도 없어서 야자를 신청했지만, 저녁을 매점빵으로 때우느니 차라리 집에 들어가는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며 정한은 야자를 신청한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유혹하는 친구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그랬다. 걔네는 칸 없는 수학교실에서 야자를 하기에 몰래 떠들기라도 하지, 정한은 혼자 똑 떨어져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한은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재밌냐? 라고 톡을 보냈다. 최승철이 ㅋㅋㅋ 라며 답을 보냈다. 재수없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폰을 주머니에 넣고 공부에 집중하려 했지만 끝없이 잠이 쏟아지는 탓에 정한은 일어나 야자실을 나갔다.
야자실은 교실이 있는 건물과 다른 건물에 있기 때문에 정한은 야자를 하다가 화장실을 갈때는 항상 건물을 옮겨갔다. 밖에 오래있어도 다시 야자실에 들어갈 때 핑계가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야자시간이 얼마 남지않아 그냥 건물 안에서 화장실을 가기로 하였다. 여기 화장실이 위층인가? 아래층인가? 잠시 생각하던 정한은 찍는 심산으로 윗층을 택하여 올라갔다. 밤공기가 스산하게 돌았다.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에 실내화 질질 끄는 소리만 가득찼다. 야자실로 쓰는 반이 없는지 어떤 반에도 불이 켜져있지 않았다. 정한은 며칠전에 본 화이트데이 게임 실황영상을 떠올리며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걸어갔다. (정한은 자신의 감이 맞았다고 생각했지만 화장실은 위아래층에 다 있었다) 그 화장실 또한 불이 꺼져있었다. 핸드폰 화면을 비추면서 더듬더듬 거리자 그제야 불이 켜졌다. 잠시 깜빡깜빡 거리다가 켜지는걸 보니 전구를 갈 때가 된 듯 보였다. 귀신을 믿는편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소름 돋을만한 분위기였다. 새벽이 아니었음에도 두꺼운 창문에는 바깥의 가로등 빛이 반사되어 푸르스름한 색을 보였다. 정한은 문을 활짝 열고 화장실로 들어가였다. 분명 아무도 없었지만 무언가 기분이 미묘하였다, 뭔가 자신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그런 미심쩍은 기분. 아마 분위기가 공포영화를 연상시켜 그럴 것이다. 만약 승철이 함께 있었다면 지레 겁 먹었을거라 생각하였다. 정한은 무심하게 끝에 자리한 칸을 열었다.
“아악!”
정한이 지른 소리는 아니었다. 정한은 오히려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하였다. 제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정한은 눈을 마주하였다. 낯익은 얼굴이다. 이름도 알고있었다. 정한은 어이없는 듯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홍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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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는 요즘 최승철이 빠짝 붙어서 치대고 있는애였다. 반장이라 전학생을 잘 적응하게 해주라는 선생님의 명령도 있었지만, 이유를 모르게 둘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최승철이 일방적으로 받아주는 것인지, 아니면 전학생이 받아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아 최승철 요즘 나랑 안 놀아주고~ 맨날 전학 온 애랑만 있고~ 라면서 몇 시간 전에도 불평을 늘어놓았었다. 이름 홍지수 맞았나? 정한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위아래로 굴리며 말했다. 여전히 홍지수의 앞머리는 길었지만 워낙 큰 눈을 지니고 있어 놀랐다는 것은 여실히 드러났다. 홍지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어. 맞아.”
스쳐가듯 들었던 차분한 목소리가 화장실 안이라 그런지 더욱 울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들렸다. 어디서 라디오 하다가 왔나. 목소리가 하나같이 일정한 톤이네. 정한은 속으로 생각하며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해답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이내 변기에 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홍지수에게 질문을 건넸다.
“너는 왜 여기있어?”
생각보다 퉁명스럽게 나온 질문에 정한은 잠시 헉. 하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정작 홍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나.. 야간자율학습 하다가 쉬러왔어.”
“땡땡이? 너 전학 온지 며칠이나 됬다고 벌써 이런데서 땡땡이치는 방법을 알아냈어?”
“...”
홍지수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정한을 바라보는 눈길에 정한은 의아함을 가지다 퍼뜩 상상력을 펼쳤다. 사실 강전이였고 그런건가?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나? 정한은 불현 듯 찾아온 불안감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생긴건 완전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사람 몇 명 패고온건가? 헐 그런거면 나 찍히면 어떡해? 다시보니까 입에..
“그러고보니 너 입에 담배도 물고있고..”
“이거 사탕이야.”
홍지수는 물고있던 막대사탕을 빼 보여주었다. 색을 보아하니 딸기맛 이었다. 정한은 저가 과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음에 잠시 회의감을 느꼈다. 홍지수는 저를 보면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주머니를 뒤져 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정한의 표정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너두 먹을래?”
“아.. 아니. 괜찮아.”
홍지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한을 쳐다보다 다시 사탕을 입에 물었다. 다시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정한은 머리를 긁적이다 다시 질문을 하였다.
“그럼 너 몇 분 동안 쉬고 있었는데?”
사탕이 입에 물려있어 홍지수는 웅얼거리며 답하였다.
“아마.. 20분? 여기 화장실은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다 잘 안 쓰더라고.”
“20분?”
나는 여기가 좋던데. 밤에 와도 창문을 보면 새벽인 것 같이 예쁘게 파랗잖아. 그리고 그런 색을 내는 창문이 여러 방향에 나있어서 좋아. 중얼거리는 홍지수의 말에 정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누가 창문색을 보고 그런걸 생각해내지. 얘 문과인가봐. 정한은 곁눈질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새벽의 하늘색이긴 하였지만 누가 야자하다가 화장실 와서 그런걸 생각한다는 말인가. 정한은 학교 화장실 창문을 보며 구리다는 생각밖에 안해봤다.
무슨 소리야.. 그건 그렇고 너 진짜 저번 학교에서 양아치였지. 정한은 혀를 내두르며 홍지수를 바라보았다. 홍지수는 다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양아치가 뭔데? 진짜 환장하겠네.
“그냥.. 온지 얼마 되지않아서 길 잃었다고 하면 봐주시던데.”
“부럽네. 먹힐때까지 써먹을 생각이야?”
그래도 이주일쯤은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는 홍지수의 표정은 아무 거리낌도 없어보였다. 정한은 계속 황당한 낯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 뭐하는 애지? 정한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홍지수의 성격을 분석할 수 없었다. 뭐하다가 온 애일까. 알고보니까 그냥 순진한 애인 것 같기도 하고. 정한은 저가 호기심이 생겼음을 느꼈다.
“그래도 지금쯤 가야될걸. 너무 오래 비우면 의심하신다.”
“응. 그래서 가려고 일어나려던 참이였어.”
정한은 자신이 입구를 막고있음을 깨달았다. 쭈뼛거리며 비켜서자 홍지수가 눈웃음을 짓고 나왔다. 웃으니까 예쁘네. 눈꼬리 휘어진거 사슴같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너 왜 앞머리 그렇게 하고 다녀. 눈 예쁜데.”
홍지수의 뒷통수에 대고 말하자 홍지수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한을 쳐다보았다. 무슨 대답을 하려는지 아무 생각도 읽어낼 수 없는 평범한 표정이었다. 가만히 저를 쳐다보던 홍지수가 말했다.
“너 아침자율학습도 해?”
“나?”
아니.. 안하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멍하니 대답한 정한을 바라보던 홍지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해.”
어쩌라는 거지. 정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홍지수를 응시했다. 하고싶은 말이 뭐야?
“내일도 30분쯤 하고 여기 올 예정이거든.”
홍지수는 사탕을 씹었는지 금세 다 먹고 남은 사탕막대를 휴지통에 버리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연 후에 다시 시선을 정한쪽으로 돌렸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새벽같은 창을 뒤에 두고있는 홍지수의 커다란 눈을 다시 마주하고 정한은 기분이 다시 오묘해짐을 느꼈다. 춥지 않음에도 이유없이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홍지수는 다시 옅게 웃었다.
“앞으로 자주보자 정한아.”
나가면서 흘리듯이 말한 문장에 정한은 눈을 껌뻑껌뻑 거렸다. 이내 자신이 멍청해 보인다는 것을 알았는지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을 나갔다. 홍지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걸음이 굉장히 빠른 모양이었다. 정한은 자신의 뒷목을 주물거렸다. 내 이름.. 알고있었네.
그날 밤은 윤정한이 잊지 못하는 유일한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