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라 빛 감정
미묘
“비현실적 이야.”
“그건 나도 알아.”
“알면 멈춰봐.”
마음이라는 것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갈무리 되지 않겠어? 곱디고운 저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미운 말이었다. 서운한 말을 하는 주제에 살짝 올라 간 선우 현의 입 꼬리가 눈에 들어 왔지만 방금 내게 전한 말은, 웃음기와는 상관없이 순수한 진심일게 분명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저 원망스러움을 한 가득 머금은 눈동자로 선우 현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꽉 깨문 입술이 아려왔지만 너무 과도하게 맞는 말만 하는 선우 현이 참 미워 계속 깨물고 있었다. 솔직한 놈.
내 원망스러운 눈빛에도 선우 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듬고 있던 노란 프리지아를 마저 정리했다. 예쁜 입술 망가진다. 입술에 힘 빼. 어허?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건데 홍지수. 왜, 내가 이상적인 친구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친구상이라 불만이야? 네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그런 거 원하면 뭐, 해줄 수 있긴 해. 피식-. 살짝 올라가 있던 선우현의 입 꼬리가 결국 양쪽 다 호를 그리며 올라가 그 속을 비집고 기어코 웃음이 터트렸다.
늘 그랬다. 선우현은 내가 화가 난(삐진 게 아니다 정말) 표정에 유독 약했다. 마음이 약해지는 게 아니고 웃음이 헤퍼졌다. 자존심을 구기며 눈에 힘을 잔뜩 준 내 표정이 혼자 보기 너무 아깝다며 싸우는 와중에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어 갔던 적도 있다. 심지어 그 사진은 아직까지도 선우 현의 폰에 얌전히 잠들어 있다. 결국 힘이 빠져버려 입술에 힘을 빼며 한숨을 푹 쉬어 버렸다.
“그만 웃지.”
“아 미치겠다. 홍지수 귀여운 거 뭐 하루 이틀이냐?”
손을 뻗어 프리지아 향이 가득히 배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선우 현을 계속 해서 흘겨보았다. 나보다 한 뼘은 작은 놈이 자꾸 나를 귀여워 하니 어이가 없었다. 어디 가서 물어봐라 너랑 나 둘 중 누가 더 귀엽냐고. 쪼꼬미인 선우 현, 너지. 그리고 진짜 꽃 만진 손으로 머리 만지지 말라니까? 대충 머리를 슥 하고 빼 내어 선우현의 손아귀에서 벗어 난 나는, 걸치고 있던 앞치마를 잘 털어 공방 한쪽에 곱게 걸쳐 놓았다. 이제야 하루가 끝나가는 것 같았다.
늘 시끄럽던 공방이 고요하게 다가오니 아까는 유독 뭔가 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니 특별하게 느껴졌었지. 둘 밖에 안 남은 공방을 둘러보다가 뜬금없이 뭔가 벅차오르는 마음에 괜히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 놨다가 싸늘하게 되받아 쳐 졌으니 명백히 과거형으로 느껴지는 게 맞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넌 너무 객관적이야. 그래서 참 좋으면서 참 짜증난다.
손을 거둔 선우 현이 어깨를 으쓱 하더니 작업대를 마저 정리했다. 꽃들과 나머지 재료들을 만지는 손길이 이제는 제법 전문가 티가 나서 기특했다. 1년 째 같이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 동지로서 선우 현은 꽤 좋은 동반자였다. 화원도 같이 하자는 내말에 매몰차게 거절당해서 조금은 슬프지만.
앞치마를 들고 벽 쪽으로 가 걸쳐 놓으려 말고 다시 돌아와 가방에 대충 쑤셔 넣었다. 아마 오늘 수업에서 수강생이 한 달 넘게 세탁하지 않은 놈의 앞치마를 가지고 놀려 댄 게 생각나 그런 것이 분명했다. 진짜 귀여운 놈이네. 크큭-. 입을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방관했다. 내가 웃는 이유를 알아 챈 선우 현이 작게 나를 째려보다가 깔끔히 정리한 가방을 작업대 사이드에 두고는 폴짝 뛰어 작업대에 올라가 앉았다.
“다리도 짧은 게 잘도 올라간다. 너.”
“너랑은 다르게 영아가 또 운동신경은 좋잖냐. 그리고 그만 웃어.”
진짜 하루에 몇 시간 안 입는 앞치마를 왜 주마다 세탁해야하는 건데? 작게 툴툴대다 투덜거림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선우현의 시선에 나도 대충 작업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래 네가 생각해도 이렇게 끝내기엔 내 고민이 너무 무겁다 그렇지? 손톱을 툭툭 치던 손끝을 멈추고 입술을 꾸물거리다 결국, 아까부터 머릿속을 돌아다니던 의문을 선우 현에게 던졌다.
“야....”
“어?”
“.......이상적인 친구였으면 어떤 말을 해줬을 건데?”
“풉 큭...”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선우 현은 거의 숨이 넘어 갈 것 같이 웃어댔다.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입을 벌리고 하하 웃는데, 나는 또 그 와중에 어서 저 웃음을 대충 멈추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궁금했는데 바로 물어 보기 조금 그래서 참았던 질문에 대한 답이. 과연 이상적인 친구는 얼마나 사탕발린 말로 나를 위로 해 줄지 궁금하고, 또 듣고 싶었다. 사실 이미 내가 말한 고민에 동요하지 않았던 것 자체가 정말 이상적인 친구상이긴 하지만.
뭔가 죽어도 선우 현에게 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사실 조금 용기가 필요했다. 무모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 왜냐면 아까 선우 현에게 상담 한 내 고민은.
“큭..하, 요컨대, 친구 놈이 갑자기 남자가 좋다는데 이상적인 친구라면 뭐라고 답해 줄 것 같냐 이 말이지? 크흑..”
“그래, 그러니까 실컷 다 웃고 나한테 격려와 용기를 복 돋아 주라고.”
“이상적인 친구라면 다 용기랑 격려를 해주나?”
“몰라, 그냥 돌려 말하는 거지. 내가 너한테 격려가 듣고 싶다고.”
넌 되게 객관적인 애라 네가 하는 말은 다 설득력이 있단 말이야. 너도 알지? 입을 삐쭉 내밀고 결국 사실을 고하였다. 이러나저러나 커밍아웃인 내 발언에 저렇게 태평할 주변인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 생각엔 선우 현, 딱 한명 밖에 없을 것 같다. 아니지, 사실 선우 현 밖에 없지.
“크흡, 그래. 그럼 자세히 말이나 해보시던가. 아까 너 그냥 나한테 툭-. [야 나 남자가 좋다] 이러고 말았잖아.”
“...대단한 요약 실력 아니냐, 역시 이과 출신은 다르지?”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그만 하고 설명이나 해 봐. 어떤 사람인데?”
아, 나 지금 부끄러워하는구나. 선우 현의 은근한 눈빛에 못 이긴 나는 손을 들어 양 쪽 귀를 만져보았다. 역시나 따뜻하기 보단 뜨거운 귓 볼. 귀신 같은 놈. 결국 또 녀석을 째려보고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너 분명 네가 말해 보라고 했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마. 어깨를 으쓱이는 녀석을 한 번 슥 본 뒤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언제였지?”
-
화원을 운영 하게 된 것은, 사실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금술이 너무 예술적으로 좋으셨던 부모님은, 늘 서로에게 꽃을 선물 하곤 했다. 그냥 길을 가다 생각이 나서, 오늘따라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날씨가 너무 좋길래 또는 오늘은 더 사랑해서. 뭐 이러한 이유들로 덕분에 집안은 늘 꽃으로 넘쳤었고, 꽃말을 전하며 건넸던 꽃들 덕분에 나도 모르는 사이 덩달아 꽃들의 꽃말 까지 외워 버리고 말았다. 화원을 하는 지금은 유용하지만, 저 때는 정말 쓸모없는 지식이었다.
넘치는 마음을 서로에게 꽃으로 표현하던 로맨틱한 두 분은 미리 주는 유산이라는 명목 하에 나에게 통장 하나와 집 한 채를 덜렁 던져 주고는 사이좋게 시골로 귀농하셨다. 그때 내 나이는 23살. 군대를 다녀와 이제 막 대학교 2학년으로 복학했을 때였고, 내 전공은 화원과는 거리가 아주 먼 건축학과였다. 진짜 어이가 없었지만 우리 부모님다웠다. 그래서 또 여느 때와 같이 수긍해 버렸다. 친구들은 내가 더 어이가 없는 놈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오년제인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웃기게도 화원과 공방을 차리는 것 이었다. 모두가 이해 할 수 없었듯, 나도 나 자신을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결국 꽃집을 차렸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처럼 순조롭게.
두둑한 통장의 돈으로 건물을 사고 인테리어를 진행하며 학원을 다녔다. 의도치 않게 자연 친화적이었던 나는,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학원에서 선우 현도 만났으니, 지금 생각해도 꽤나 괜찮은 선택인 게 분명했다.
부모님은 화원을 차렸다는 내 말에 그냥 허허 웃으시는 게 다였다. 그리고 아무 반응도 없으셨다. 약간 뭐랄까....그래서 뭐? 라고 말하기 뭐해 웃음으로 무마하는 느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서 그냥 넘어갔다. 여전히 두 분만의 세상에 계셨다.
마음이 잘 맞던 선우 현을 꼬셔 공방은 함께 운영하고, 홀로 화원을 운영한지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설픈 것들도 많고 수강생들을 다루는 것도 어설펐지만 지금은 꽤 잘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나는 꽃이 참 좋아서, 꽤나 즐겁게 향기들에 둘러쌓여 열심히 지냈다.
그래서 몰랐나 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잊고 살았지. 올해 28살이 된 내가, 연애를 안 한지 8년이 지났다는 것을.
그도 그럴게, 공방과 화원을 연 첫 해인 작년 봄에는 동백나무꽃잎과 모란, 유채꽃, 금창초에 빠져 꽃다발을 만들었고 여름에는 나도 바람꽃과 장미 그리고 해바라기에 취해 벽 한쪽을 해바라기 밭으로 만들었다.
의욕이 넘치던 작년 가을에는 투구 꽃을 엮어 화관을 만드는 클래스를 계획 했다가 선우 현에게 등짝을 맞기도 했다. 투구 꽃의 꽃말은 무려 밤의 열림이었으니. 그래서 연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다 올해 초, 아무 변함없는 잔잔한 일상을 지내는 찰나에 그 남자가 찾아왔다. 나를 찾아 온 게 아니라 꽃을 찾아 왔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옅게 피어나는 연보라 향기의 미소를 내게 보여준 남자는 예전 18살 때, 첫사랑이 시작을 알렸던 내 감정을 불러 들였다, 그것도 마음대로. 눈이 마주치자 경직 되어 버린 나의 뒷목의 느낌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아아..나는 지금 아마도.
“사랑에 빠졌다고?”
맞아.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렸다니까? 마주하고 몇 초 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더라? 고개를 갸우뚱 해보며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느새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은 어이가 없음. 딱 이 문장 그대로였다. 그렇게 쳐다봐도 달라질 건 없다, 사랑에 빠진 건 빠진 거야. 무려 8년 만인데?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첫 만남을 떠올리며 절로 호를 그리며 올라가는 입 꼬리를 단속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건 좀 많이 특별한 것 같아. 그 순간은, 나에겐 무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으니까.
“응. 진짜 웃는 게 너무 예쁜 거야... 뭔가 라벤더 같은?”
“겨울철에 무슨 라벤더래.”
플로리스트인거 티내기는. 겨울철에 라벤더 공수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너도 알지? 관리 진짜 힘들다고. 근데 사람들이 진짜 자주 찾는 게 또 라벤더다? 아무래도 꽃 많이 모르는 사람들이 그나마 쉬운 게 라벤더라서 그런 건가? 심드렁한 표정의 녀석은 라벤더라는 단어에 입술을 내밀고 툴툴대기 시작했다.
사실 귀여운 그 툴툴댐은 내가 받아주면 그만 이지만 나는 계속 해서 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조용해진 나를 알아 챈 녀석은 뭔가를 더 말하려던 입술을 누르더니 그게 끝이야? 라며 다시 물음을 던졌다. 나는 그 말에 기쁘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내가 널 이래서 참 좋아해. 눈치가 엄청 빠른 점. 신이나 물결치는 내 눈 꼬리에 어린 동생 보듯 씨익 웃는 선우 현의 미소는 덤이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지. 그러니까 그 남자가 꽃집에 뭘 사러 온 거냐면.”
-
[장미요?]
[네. 선물하려구요.]
그 당시 나는, 물에 번지 듯 퍼져가는 이 감정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실감이 안 나기도 해서 눈을 마주해 오는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꼭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가게주인이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남자는 잠시 멈칫 하더니 장미가 있냐고 물었다. 순간 찬 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장미...장미라니, 여자 친구에게 줄 꽃인 걸까. 혹시 사랑에 빠지자마자 바로 차여 보신 분계시나요. 여기 한 명 더 추가요. 한 5초 전 까지는 연 보라 빛 바람이 솔솔 불어 왔던 것 같은데 급격히 식어버린 나 혼자만의 분위기가 어이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을 한 번 깨문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남자에게 물었다.
[특별히 찾으시는 종류 있으세요?]
[아니요, 어떤 게 있죠?]
[만약 여자 친구 분 드릴 거면 올 포 러브 장미 추천해 드릴게요. 여자 분들한테 인기 정말 많아요.]
남자에게 연 핑크색의 장미를 내밀자 환하게 웃으며 장미를 받아 들었다. 아..진짜 웃는 거 왜 그렇게 웃으세요. 정말 저를 간지럽게 만들어요. 그 미소. 남자의 아찔한 미소에 잠시 정신을 내려놓았다가 빠르게 다 잡았다. 남자에겐 방금 내가 그저 장미에 대해 설명하는 걸로 들리겠지만 여기엔 검은 마음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연스럽게 여자 친구의 유무를 물어 본 것. 여자 친구 있어요? 아니면 남자 친구? 네 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을 떠보는 거랍니다. 형식적인 미소를 띠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흑심을 품고 물어본 주제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과연 저 입술에서는 무슨 말이 나올까.
[아쉽게도 여자 친구는 없지만, 저희 어머니가 좋아 하시겠네요. 정말 예뻐요.]
세상에, 여자 친구가 없대. 남자가 쑥스러운 듯 달큰 하게도 웃으며 말했다. 장미가 맘에 드는지 장미 잎을 계속해서 매만지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굉장히 환하게 웃어버렸다. 입 꼬리가 이렇게 올라가다가는 눈을 찌를 것 같은데. 결국 장미에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겨 버린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내가 황급히 얼굴빛을 바꿨지만 몇 초간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남자와 눈을 맞췄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남자는 민망해 하는 나를 보고 즐거운 듯 웃었다.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원래 잘 웃는 스타일이라..하하. 얼굴은 아니어도 귓 볼은 빨개졌을 것 같았다. 빨개졌을 귓 볼이 민망해 하하 웃어 보이다, 남자가 이어서 내게 한 말에 결국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웃는 거 진짜 예뻐요.]
[네?]
[아, 남자 분한테 예쁘다는 말은 실례인가.. 죄송해요.]
근데 진짜 예뻐요. 특히 웃을 때, 잘 어울려요 꽃이랑. 남자의 말에 결국 무장해제 돼버리고 말았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입 꼬리와 휘어지는 눈 꼬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 콤플렉스라 진짜 싫어했는데, 이제 극복한 것 같아. 그것도 이렇게 간단하게. 이 당시에 나는, 남자에게 반했다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았고, 남자가 하는 말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맘에 들었다. 실제로 나는 제법 생긴 편이었고, 잘생긴 남자에게 반하는 건 자연의 섭리였다. 대한민국 남자들 중 60% 이상이 동성애 성향이 있다고 본 적이 있다. 결혼을 하고 애까지 낳은 상태에서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이정도면 빨리 알게 된 편 아닌가? 계속해서 행복회로를 머릿속에서 돌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
"그래서?"
“하하호호 웃다가 서로 머쓱해져서, 나는 꽃다발 만들고 그 사람은 꽃집 구경하다가 갔어.”
“갔다고??”
“응, 갔는데?”
“그게 끝이야?”
그게 끝이다. 근데 뭔가 끝이라고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뭔가 체한 듯 한 선우 현의 표정이 조금 무서웠다. 괜히 잘못한 사람마냥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뭘 더..”
“그게 언제야.”
아, 방금 한 쪽 눈썹만 꿀렁하고 올라갔다. 답답한지 양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 선우 현이 손바닥을 쫙 펴서 자신을 달래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언제냐고?
“그 남자가 처음 본 날.”
“한 달 전..?”
“그럼 그 후에는 뭐 더 없었어?”
눈을 깜빡이며 생각을 해 봤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이후도 여러 번 마주쳤지. 가게에도 여러 번 와서 꽃도 사가고. 그러다 문득, 지난 주 비가 많이 오던 금요일이 떠올랐다.
있네. 있었어. 수많은 물음표로 가득했던 날이.
-
그 날 이후 남자는 여러 번 가게를 찾아왔다. 수치로 나타내자면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지난번에 사간 장미 꽃다발이 마음에 들었는지 꽤 여러 종류의 꽃다발을 주문하곤 했다. 사실 나는 첫 만남이 마지막 만남일 줄 알고 굉장히 허탈해 했었는데, 자주 화원을 찾아 주는 남자가 고마웠다.
여러 번 얼굴을 마주 하다 보니 남자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꽤 많았다. 여기랑은 거리가 조금 먼 역 주변에 살고 있으며 직업은 디자이너, 나이는 나보다 2살 연상인 31살로 알기로는 독신, 그리고 꽤나 넉살 좋고 장난기 많은 사람이라는 점. 그 사람은 내 명함을 가져갔기에 내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다, 그의 이름을. 물어 볼 타이밍을 놓쳐 벌써 몇 주째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남자는 꽃다발을 자주 주문했다. 어떤 날은 라넌큘러스, 또 어떤 날은 아이리스. 올 때마다 주문하는 꽃 종류가 다양해질수록 나는 점점 궁금해져만 갔다. 대체 이 꽃들은 누구를 주려고 주문하는 걸까. 어머님을 드린다고 하기에는 주에 3다발이나 주문해 가니, 너무 양이 많다고 생각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남자가 주문한 꽃은 맨스필드파크 장미, 행복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장미였다.
나에게 추천을 받지 않고 알아서 꽃의 종류를 알아와 주문해 가는 남자가 조금 기특하면서도 의문스러웠다. 그새 여자 친구가 생긴 건가? 그런 것 치고는 퇴근하고 심심해서 요즘은 자기 전에 영화를 자주 본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한 송이, 한 송이 씩 정성스레 장미를 다듬는 손은 빨랐지만 생각은 더뎠다.
밖에서 무섭게 내려대는 비는 실내에선 그저 듣기 좋은 음악과 다를 게 없었다. 공방은 월, 화, 수, 토요일만 운영되기에 선우 현도 없어서 화원엔 나 혼자였다. 물론 대부분 홀로 꽃집을 지키지만 날이 어둑해 짐에 따라 뭔가 조금 울적한 기운이 스멀스멀 발끝을 타고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아 빗소리 진짜 좋다, 좋은데 왜 우울하지. 아 여자 친구가 생긴 걸까, 그런 게 아니라면 왜 꽃을..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들던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돌려 털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6시가 넘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오겠네. 그 남자. 보통꽃집 닫는 시간이 7시였고, 남자는 보통 가게가 닫기 직전에 꽃을 찾으러 오곤 했다.
부지런히 다듬은 장미로 화려한 꽃다발을 만들어 작업대 끝에 잘 정리해 두고 창 쪽으로 가 밖을 내다봤다. 진짜 엄청 쏟아지는 구나. 퇴근시간의 길거리는 안에서 봐도 제법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릴 만큼 복잡해 보였다. 우산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우산이 없어 뛰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감기 걸리겠다, 아직 봄 오려면 멀었는데.
그러다 익숙한 실루엣이 우산 없이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창틀 쪽에 바짝 다가서 손바닥으로 빛을 차단하고 집중해서 보니 역시나 그 남자였다. 깜짝 놀라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 급하게 문을 열었다. 차갑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모든 게 비에 흠뻑 젖은 남자가 들어섰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바닥이 엉망이 됐네.]
[바닥은 닦으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닦아도 젖어있을 것 같은데...
[저 지금 딱 물에 젖은 생쥐 꼴이죠, 지수씨?]
지금 웃음이 나오시나요. 남자는 물에 쫄딱 젖은 자신의 꼴이 웃긴지 웃으며 젖어버린 코트를 벗었다. 아 역시나 어깨가 되게 넓구나. 물에 젖어 딱 붙어 버린 셔츠 덕에(아쉽게도 검은 셔츠였다.) 남자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꿀꺽, 소리 없이 침을 한 번 삼킨 나는 구석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말없이 남자에게 둘러 주었다. 아 방금 진짜 눈에 독이었다. 살짝 이성을 잃고 달려들 뻔 했어. 잘 참았다, 홍지수.
갈아입을 여분의 옷이 있을 리가 없었다. 미라 만들어 놓은 꽃다발을 내밀며 택시를 타고 집에 바로 가는 것을 권했으나 남자는 옷을 말리고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거절했다. 당황한 내가 대꾸할 겨를 없이 젖어 버린 코트를 들고 안절부절못하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봤다. 아 퇴근시간이구나. 아니 딱히 그래서 그런걸 아닌데...말꼬리를 늘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다. 나도 좀 더 같이 있고 싶긴 했지만, 저대로 남자를 두기에는 감기에 걸릴 것이 뻔했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 보았다.
[저기..괜찮으시면 제가 태워다 드려도 될까요?]
[그럼 저야 좋죠, 고마워요 지수씨.]
대충 가게를 마감하고 상가 주차장으로 가 차를 빼왔다. 여분의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던 남자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내가 신기한지 계속해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쫓으며 조수석에 착석했다. 사실 조금 부담스러워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 앞만 주시했다. 나의 태도에 남자는 작게 웃으며 [진짜 귀엽다, 운전하는 모습도 귀여워요.] 라고 잔잔한 내 마음에 돌을 던지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귀엽다니, 귀엽다고 한 건가 나한테? 머릿속은 당황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빗길의 운전이라 계속해서 앞을 주시했다. 여유로운 남자의 태도와 안절부절못한 나의 태도가 극명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수리를 맡긴 차를 찾으러 가기 귀찮아 몇 주째 방치해 두고 있다고 말했다. 대중교통 이용하는 게 더 귀찮지 않냐 는 내 말에 웃으며 [그것도 그러네요.]라고 해맑은 음성으로 답했다. 진짜 나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이런 엉뚱한 점이 귀여워 보인다니. 남자의 대답에 멍 하다 풉하고 터진 내 웃음은 멈출 생각을 못 했다. 남자는 내 웃음에 만족스러운 듯한 음성이로 말했다.
[역시 지수씨는 웃는 게 보기 좋아, 아까부터 인상만 쓰고 있어서 좀 아쉬웠어요.]
[걱정 되니까 그렇죠.]
[내가 걱정 됐어요?]
[당연하죠!]
[왜요?]
왜요? 왜 걱정을 하냐고? 그야...
[그야...]
[....]
[그러니까..]
맙소사, 여기서 말문이 막혀 버리면 안 되는 건데, 순간 입이 얼어 버렸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조금씩 잦아든 빗줄기 덕분에 운전 하는 것에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지금 이 차안의 공기가 불편했다. 계속해서 장난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던 남자는 아까와는 다르게 내 대답을 기다리는지 조용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야..아프시면 밖에 못 나오실 거고, 그러다 보면 회사도 못 가실 테고 그러니까 그러면..]
우리 가게 못 오잖아요. 그럼 나 당신 못 보는 건데..
[슬프니까..?]
[슬퍼요?]
[아, 아무래도 저희 화원 단골이시니까 걱정되죠.]
[아 그렇구나.]
아쉽네.. 남자는 정말 아쉽다는 듯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중얼 거려봤자 같은 차 안이었고, 빗소리에 묻히기에는 바깥의 비는 많이 잦아 들어있었다. 분위기가 정말 이상했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망상과 오해로 터질듯 한 열감이 얼굴로 몰려들어 정신이 아찔했다. 뭐가 아쉽다는 걸까. 지금 굉장히 오해성이 짙은 태도와 언행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본인은 알고 있나요? 설마 당신이 원했던 대답은 그저 나의 걱정인가요?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물음표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술을 떼어 말했다.
[나는 지수씨가 그냥 내가 아플까봐 걱정해줬으면 좋겠는데, 손님으로 말고.]
[......네?]
[오늘 내 이름 알려 줄라고 했는데 조금 미우니까 다음에 알려줄게요.]
사실 물어보려고 눈치 보는 게 너무 귀여워서 일부러 모르는 척 했거든요. 몰랐죠?
[당연하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본인은 내 이름이랑 다 알고 있으면서!]
[지수씨도 은근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잖아요.]
[직업이요? 사는 곳? 그건 꽃다발 감싸는 속지 고르시다가 먼저 말씀해 주셔서 알게 된거고, 집도! 지금 데려다 드려야 하니까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이잖아요!]
잔뜩 억울해진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 은근히 사람 놀리는 거 즐기는 스타일인 것 같은데. 웃기지만 이런 점마저 맘에 들었다. 같이 있으면 즐거웠고, 놀림 받는 입장이라 가끔은 억울하기도 했지만 나도 딱히 당하고만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같이 한 방 먹이며 놀리며 주고받는 대화들이 유쾌했다.
[그렇게 내 이름이 알고 싶었어요?]
[당연하죠!]
[왜요? 내가 단골 고객이라서?]
남자는 나를 시험하듯 아까부터 물음표를 날리고 있었다. 사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답은 간단했으니, 나도 그가 나를 지수 씨라고 부르는 것처럼 다정하게 불러 보고 싶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은건 당연한건데.
[아니요.]
[그럼?]
[좀 더..친해지고 싶어서요.]
[아...]
[저도 이름 불러 드리고 싶어요.]
[.....]
[그래서 알고 싶어요.]
무슨 정신에 말을 했는지 자각할 수 없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망설이지 않고 답하는 내 목소리에 남자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마른세수를 했다. 거의 잦아든 빗줄기 때문인지 차 안은 유독 고요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려고 했으나 어느새 얼굴에서 내린 남자의 손에 의해 제지 되었다.
[다음에 만날 때 알려 줄게요.]
[이름이요?]
[꽃다발 찾으러 가는 거 말고 지수씨 만나러 갈게요]
그래도 되죠? 남자는 담담하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건 없이 그냥 나를 만나러 온다고.
[기다릴게요.]
[좋아요.]
남자의 기분 좋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어느새 비는 그친 채였다. 차를 세우고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은 괜찮았지만 여전히 머리와 몸 전체가 젖어 있었으며, 내가 둘러준 담요도 조금 젖어 있었다. 춥지도 않은지 남자는 아까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컨디션으로 내게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어요.]
[네,,,]
[그리고 오늘 주문한 꽃다발은, 사실 지수씨 꺼에요.]
[제 꺼요?]
그러고 보니 만들어 둔 꽃다발을 챙긴 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기분에 어느새 차에서 내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네.]
맨스필드파크 장미꽃말이 지수씨랑 너무 잘 어울려서 주고 싶었어요. 본인이 만든 거 선물하는 거 조금 웃기긴 한데, 지수씨가 만든 꽃다발만큼 예쁜 장식은 본 적이 없어서 어쩔수 없었어요. 그럼 조심히 가요! 고마웠어요!
[저, 저기!]
남자는 내 부름에 뒤를 돈 채로 손을 흔들며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아파트 쪽으로 가버렸다. 남자가 지금 나에게 남긴 것은 수많은 물음들과 오해, 착각 그리고 콕 찌르면 터질 것 같이 달아 오른 두 뺨이었다.
-
“와...”
얘기를 다 들은 선우 현은 뭔가 아리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너도 헷갈리니, 그렇다면 나는 어떻겠어. 생각보다 길어진 이야기에 시간은 꽤나 지나있었다. 신경 안 쓴다는 듯 창 밖을 슥 한 번 본 선우 현은 턱을 괘고 있던 팔을 바꾸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좀 심각한데.”
“진짜 이상하지, 뭔가...그 사람 태도랑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자꾸 오해 하게 돼.”
“오늘이 화요일이지?”
“응.”
“그 일 있고나서 사일 지났네.”
“그러게.”
사실 월요일인 어제, 그가 오진 않을 까 기다리기도 했지만 오지 않았다. 말을 다 하고 보니 더욱 복잡해진 기분에 두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나도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남자한테 반한 걸 신경 쓰지 않지만 그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가능성을 마음먹은 만큼 열어 둘 수도 없었고, 또 마음껏 착각할 수도 없었다.
“뭘 그렇게 괴로워하고 그래. 보는 사람도 복잡하게.”
“내 입장이 그런 걸 어떻게 해.”
“내가 보기엔 막 그렇게 가능성이 없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떤 면에서?”
“너 혹시 그 남자 갈색곱슬머리에, 피부는 흰 편이고 키는 너보다 좀 더 크냐? 게다가 잘생기고.”
“어! 맞아 딱 그래!”
“지금 너 뒤에 서 계신다.”
“뭐?????”
선우 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보자 정말 그가 서있었다.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고 화원과 공방의 사이의 문을 살짝 열고.
“죄송해요. 너무 집중해서 대화하고 계셔서..”
“아닙니다. 그것 보다, 다 들으셨으면 이 걱정인형 데리고 나가서 오해 좀 풀어 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대신, 선우 현이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았다. 걱정인형? 내가? 그리고 그럼 다 듣고 있었다는 거야?
“나...나...어..그러니까,”
“공방이랑 화원 내가 문 잠그고 갈 테니까 너 먼저 가라. 아까 내가 정리한 프리지아, 그거 지금 완전 나랑 같은 꽃말이다. 나한테 고마워해! 아,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럼.”
굳어 있는 내 쪽으로 다가온 그가 자연스레 내 겉옷을 챙기며 나를 작업대에서 끌어내려 품에 안듯 챙겼다. 귀찮다는 듯, 선우 현이 손을 휘이휘이 휘저으며 어서 나가라는 듯 한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프리지아? 내가 알기론 프리지아의 꽃말은...
“우정...”
-
사람이 너무 놀라면 굳는 다는 말 그대로 나는 그저 가만히 그가 이끄는 대로 화원을 나 올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둘은 주차장 옆의 작은 산책길에 있었고, 오늘 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그는 계속 해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저, 저기 그러니까...다 듣고 계셨어요?”
“음, 다 들은 건 아닌데.”
“그럼..?”
“지수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정도로?”
“..아...”
난 몰라. 이대로 터져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 이 산책로의 돌이 되고 싶다. 그러면 이 상황을 빠져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상하고 현실과는 먼 생각들을 하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갑자기 손등으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지수씨.”
“네...”
"윤정한이에요."
"..."
"내 이름."
"아..."
“지수씨.”
“네?”
“나 지수씨를 좋아해요.”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해야 이 사람이 나를 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새하얘지는 순간이었다. 이름도 멋있는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저 잡힌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가 나머지 한손으로 나 고개를 들게 만들어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장난기 없이 진지한 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머뭇거리던 그가 결심했는지 달싹거리던 입술을 열어 말 했다.
“사실, 그 날 이후 감기에 걸려서 조금 늦었어요. 걱정 할까봐 다 나으면 오려고 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지났네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줘요.”
조금은 긴장 한 것 같은 모습의 그는 처음 보는 지라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피하지 않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당장 필요하지 않는 꽃다발을 핑계로 꽃집에 자주 갈 만큼 당신이 궁금해요. 비에 젖어 추워서 집에 가고 싶은데, 옷 다 말리고 가겠다고 이상한 억지를 쓸 만큼 당신한테 자꾸만 마음이 가요.”
“....”
“사실 나, 집에 잔뜩 장식 된 지수 씨가 만든 꽃다발을 보고 맨날 바보 같이 웃어요. 몰랐죠?”
“아...”
“비 오던 날, 차 안에서 느꼈던 우리사이 기류 있잖아요, 그거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면..... 고개 한 번만 끄덕여 줄래요?
그는, 아니 정한 씨는 여유롭지만 어쩐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고백하듯 말을 이어갔다. 고백이 맞을까, 맞겠지. 이렇게 맞잡은 손이 떨려오는 게 느껴질 정도면. 나는 눈을 접어 웃으며 손을 더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현실적인 현실이 진짜 내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마주 보던 눈이 감기고 그렇게 그림자가 겹쳐졌다.
드디어 함께 번져갔다, 이 연보라 빛 감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