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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과 초록 사이

​주아

지수야, 넌 참 푸르렀다.

정한아, 너도 참 푸르렀다.

 

 

 

 

 

정한은 해질녘의 지수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날씨가 적당히 풀리자 덥다며 슬쩍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초저녁의 바람에 휘날리는 까만 머리칼과, 주홍빛으로 달아오른 햇빛을 듬뿍 받은 동그란 동공이 밝은 갈색으로 물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끔, 그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꾹꾹 누르고 지수의 옆을 꿰차 나른하게 몸을 뻗고 잠을 청했다. 그러면 지수는 잠시 타박하듯 정한의 어깨를 밀었다가도 금세 허벅지를 내주고 머리카락을 살며시 정리해줬다. 행여나 따가운 형광등의 빛이 정한의 잠을 방해할까 눈을 슬며시 덮어주고, 그게 또 간지러울까봐 적당히 뒤쪽으로 넘겨준다.

 

“정한아.”

“응, 지수야.”

“안 잤네.”

“아직 안 졸려서.”

“그렇구나.”

 

정한의 포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슬쩍 흩어졌다. 둥그런 눈에 새하얀 전등빛이 들어가 밝은 갈색으로 반짝인다. 지수가 손을 들어 빛을 가렸다. 금세 어둡게 가라앉은 동공에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그걸 알아챈건지 대뜸 손목을 잡고 치워버린다.

 

“눈 안 부셔?”

“부셔. 근데 너 내 눈 좋아하잖아.”

 

귀가 뜨거워졌다. 아마 새빨갛게 물들었겠지. 그 예감이 맞았던 듯 정한이 팔을 들어 지수의 귀를 만지작거린다. 한참동안이나 그러던 정한이 대뜸 일어나더니 책상에 엎드린다. 이미 공부할 마음은 다 사라진지 오래여서, 지수는 말끄러미 정한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누가 뭐라할 세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그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숨을 탐하며, 눈꺼풀을 닫지 않은 채로 끝까지 서로를 바라봤다.

 

 

-

 

 

지수는 작은 화분 하나를 키웠다. 그의 방에 들어가면 창문가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정한은 가방을 내려놓고 그걸 들어 지수의 책상 위에 놓았다. 아직 다 저물지 않은 햇빛이 방 안 가득 쏟아져내렸다. 정한이 아무렇게 침대 위로 털썩 누워버리자 지수는 말없이 의자 위에 앉았다. 제 옆으로 오지 않는 체온에 의아했던지 고개를 빼꼼히 들고 이불을 탕탕 두드린다. 그게 꼭 고양이 같아,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귀여워서.”

“이리 와, 지수야.”

 

못 이기는 척, 정한의 옆에 눕자 꼭, 허리를 휘감고 제 쪽으로 끌어온다. 푸릇한 풀향이 나는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깊게 내쉰다.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괜히 긴장되어 지수가 정한의 손목을 더듬거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정한은 한참동안 지수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부빗거리다 잠에 들었다. 그 긴 시간동안 지수는 푸르게 변해가는 창문 그림자를 보며 홀로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니 등 뒤의 따스함은 이미 없어져 버린지 오래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제 어깨까지 얌전히 덮인 이불은, 그가 해둔 것이 분명했다. 밖에서 부모님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괜시리 눈물이 났다.

 

 

-

 

 

도서관은 언제나 조용했다. 딱히 그곳에 걸음하는 취미도 없었지만, 정한은 계속해서 누군가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받는 아이는 부담스럽다는 기색도 내비치지 않아, 괜히 승부욕이 돌아 눈에 힘을 주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흥미로움을 한가득 담아 서가를 훑는다. 기다란 손가락이 낡은 책들 사이를 유영하더니 곧 몇 권을 꺼내 품에 넣는다. 맥없이 슬리퍼만 까딱이던 정한은 가만히 창 밖을 바라봤다. 해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몇 개월 전이었으면 붉었을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홍지수.”

“어, 정한아.”

“끝났어?”

“응.”

“가자, 빨리.”

 

지이익, 패딩 지퍼가 올라가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렸다. 도서관 크기가 작기도 하고, 원채 학생들이 걸음하지 않는 곳이라, 눈치 줄 사람은 사서 선생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정한과 지수만 그 작은 공간에 있었다. 춥다며 맨 안쪽에 새카만 목폴라를 입고, 교복 셔츠는 불편하다며 두툼한 후드티를 걸친 자신과는 달리, 완벽히 마이까지 입고있는 지수를 빤히 바라보던 정한이 춥지 않냐며 물었다.

 

“별로.”

 

아까부터 묘하게 틱틱거리는 말투에 정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싶어 지수의 표정을 보았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지수야, 너네 집 가도 돼?”

“너 또 말없이 갈 거잖아.”

“응?”

 

지수는 그 말을 뱉고 잠시 후회했다. 칭얼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을 꾹 깨물고 앞서자 뒤에서 정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아리 활동 때문이었는지 하늘은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또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너 울어?”

“…안 울어.”

“울잖아, 미안해. 지수야, 울지마.”

 

정한이 뒤에서 지수를 푹 안았다. 그 다정함에 결국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왜 별 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울어야 할지, 자신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남학생 하나가 울기 시작하자 간간히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길이 꽂힌다. 코를 훌쩍이며 억지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정한이 지수의 앞으로 와 천천히 머리를 감싸 안는다.

 

“그럼 오늘은 우리 집 가자, 지수야.”

“….”

“네가 말없이 갈래? 그럴까?”

“몰라, 안 그럴거야. 나 안 운다고, 윤정한 멍청아.”

“응, 그래, 가자, 우리 집.”

 

크흥, 지수가 대충 울음을 멈추자 정한이 손을 꼭 붙잡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지수의 손에 뜨끈한 온기가 닿았다. 추운데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씩 마시고 들어가야겠다고 마음 먹은 정한이 급하게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수는 그 선택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기분이 좋아진 채로 정한의 집으로 향했다. 지수를 반갑게 맞아주는 정한의 부모님을 뒤로하고 방에 들어가자 뭔가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너도 이거 키워?”

“…들켰네.”

 

연둣빛의 작은 화분이 책상 위에 얌전히 제 푸릇함을 뽐내고 있었다. 문득 제 것이 떠올라 풉, 웃으니 정한의 하얀 뺨에 홍조가 올라온다.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 그리 말하자 어깨를 으쓱한다. 지수는 문득 장난기가 돌아 천천히 그 작은 화분을 들고 정한에게 다가갔다. 뒷걸음질치는 정한에 승부욕이 돌아 계속 발걸음을 유지하다, 갑자기 온 방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전등 스위치에 등이 닿아 불이 꺼졌다. 밖은 아직 해가 지지 않아 푸릇함이 감돌고 있었다.

 

“…지수야.”

“응?”

“뽀뽀할래?”

 

아, 지수의 눈이 감겼다. 그 밝은 조명 아래서 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입맞춤이었다. 제 손에 들린 초록이 둘을 감싸는 것 같은 기분은 꽤나 좋았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마치 초저녁의 햇빛마냥. 반대되는 색조를 가진 색이었지만, 푸르다는 것은 같아서, 지수는 갑자기 정한의 어두운 동공을 보고 싶었다. 살며시 눈을 뜨자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생긋, 웃었다. 너는 정말 푸르구나. 입술을 떼고 그리 중얼거리자, 너도, 라는 답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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