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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간 上

Tiesto

고궁의 폐장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국악이 퍼졌다. 휑한 가운데 교복 차림의 아이가 서 있다. 아이는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는 작은 궁을 관람하던 중이었다. 남은 관람 시간은 삼십 분 남짓. 안내문에 적힌 황제의 마지막 말을 서둘러 읽었다.‬

 

비록 짧은 생을 살았으나 목숨보다 귀한 것을 세상에 남겨 놓았으니, 죽는 것에 어찌 미련 있으랴. ‬

 

“황제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 대체 뭘까.”

 

아이는 조용히 혼잣말 한다. 황제가 살았을 시대를 떠올렸다. 국사를 좋아하던 아이였으므로 쉽게 가능했다. 무너진 황권과 유악해진 나라. 안팎으로 불안한 정세와 열강의 침입. 거대한 역병이 돌았으며 아편으로 고통 받은 백성들. 하나씩 살펴보자면 나열한 모든 것을 황제의 목숨과 맞바꾸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를 자른대도, 손가락이 아닌 손톱 한 쪽만을 원한다 해도. 그 무엇도 주지 않을 테지. 황가의 자존심이란 흔히들 그러한 것이니까.

 

“그나저나 무슨 황제가 저렇게 잘생겼어.”

 

들어가지 마시오. 라고 쓰여 있는 작은 팻말과 금줄이 둘러진 곳에는 살아생전 황제가 사용하던 가구와 집기, 의복 등과 여러 장의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황제의 사후 천년을 기리는 명목 하에 열린 전시였으나 흥미가 당기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서른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인물이라 남길 것도 없었는지 갖춰놓은 구색이 영 볼품없다. 아이는 황제의 사진에 주목했다. 빛바랜 사진 속 인물이 말 그대로 훤했다. 서양식 정복을 갖춰 입은 차림이 그림처럼 근사하다.

 

“황후의 사진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이는 미처 살피지 못한 사진을 꼼꼼하게 확인한다. 그러다 외국인을 닮은 인물과 담소를 나누는 듯한 황제를 발견했다. 아, 하며 저절로 탄식한다. 벽 한쪽에 사물처럼 서 있는 인영. 이 사람이 황후인 걸까.

 

황후는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황제는 평생 황후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다른 후궁을 들이지 않았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지. 그러나 그렇게 사랑받던 사람은 이름 석 자를 제외하면 역사에 남은 기록이 전혀 없었다. 황제 옆에 선 나인이 작게 기침만 하여도 가감 없이 모든 상황을 기록한다던 실록에서조차 황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말살한 것이 분명하였으나 그럴만한 배후 또한 불분명하다. 자국의 황후에게 그런 짓을 저지를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황후는 아주 가끔씩 황제와 함께 찍힌 사진으로나마 발견되곤 했는데, 알 수 없는 일들로 모두 소실되었다. 알 수 없는 일들의 대부분은 방화이지 않을까, 하고 정부처는 예상했다. 불길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진이었던 것들은 하나같이 검은 재로 남았기에 그리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에 놀란 아이가 주춤거렸다. 고개는 저절로 소리의 방향을 향했다. 곁을 스치는 남자. 어쩐지 낯이 익었다. 아이는 걸음을 옮겨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믿을 수 없어. 넋이 나간 듯 읊조렸다.

 

아이가 남자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땐, 남자는 황제의 사진이 전시된 쇼케이스를 손톱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전부 없앴다고 생각했거늘.”

 

순간 남자의 손끝에서 불꽃 따위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보았으나 아이는 도무지 제 눈을 믿을 수 없었으므로 확신할 수 없어 곤란했다. 몇 번씩 눈을 비볐다. 꿈이겠지. 꿈일 거야.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게 맞을 텐데. 쇼케이스 안에 든 것들이 불타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진들만 골라서.

 

너무 놀라 눈만 둥그렇게 뜨는 아이에게 남자는 검지를 세웠다. 쉬, 하고 옅은 바람 소리를 내었다. 남자는 출입이 금지된 곳을 가볍게 넘었다.

 

“들어가면 안 되는데….”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남자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로코코 풍 장식이 화려한 소파 위에 앉는다. 팔걸이에 기댄 채 턱을 괸 남자. 누가 보아도 명확한 황제 윤정한이었다. 긴 두 다리를 겹쳐 꼬아 앉은 모습은, 좀 전에 보았던 사진 속 그대로였다. 그는 어느 샌가 손에 들린 사진을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황제는 품속에서 모노클을 꺼냈다. 왼쪽 눈에 장작한 후 나지막이 속삭인다.

 

“나의 황후는 여전히 아름답군.”

“당신은….”

“하지만 세상에 남겨서는 아니 되지.”

 

황제는 사진 속 인물에게 깊이 입 맞춘다. 얼굴을 떼어냈을 땐 고아한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았음에도 확신할 수 없었던 불꽃이 황제의 손아귀에서 다시금 일었다. 마지막 남은 사진 한 장마저 재로 남았다. 때마침 알맞은 바람이 불었다. 타버린 것을 확인 시켜주듯 검은 재를 순식간에 쓸어갔다.

 

그리고 어느덧 아이 곁으로 다가온 황제는,

 

“나는 이 나라의 황제였단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세상이 없어진 것은 아닐까. 잠깐이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기억을 더듬는다. 황제의 음성을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영혼이 분리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몸으로부터 단절된 감각이 선명했으니까. 손과 팔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어느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리 위에선 수천, 수만 번의 해가 뜨고 지는 장면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도중에 기절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이가 눈을 떴을 땐 주위가 온통 암흑이었다. 작은 소음조차 부존재하다.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차분했고, 평온했다.

 

약간의 시간을 허비하자 어둠에 익숙해졌다. 조금씩이지만 걸을 수도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흰색 점처럼 미약한 빛이 보였다. 아이는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끝이 없는 긴 터널을 걷는 것 같다.

 

마침내 빛의 마지막 지점까지 도달했을 때. 도착한 곳은 아무 색채감이 없는 흑백 세상이었다. 그렇지만 익숙한 공간이다. 고궁의 입구였다.

 

“미안하게 됐구나. 그저 약간의 장난을 놓은 것뿐이었는데.”

 

아이는 머뭇거렸다. 눈앞의 황제를 무어라 불러야 좋을지 몰라서 약간의 고민을 한다. 고민 끝에 고개 숙이며 말을 한다. 폐하, 라고.

 

“오랜만에 듣는 구나. 폐하라니.”

“….”

“이름이 뭐지?”

“지나….입니다.”

“외국식 이름이군. 흔치 않구나.”

“저희 세대에선 흔한 일이죠.”

 

황제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곧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지나는 조금 웃었다.

 

“이 곳은 내가 만든 공간이야. 잃기 싫은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내 기억으로 만든 나의 공간이지. 사람을 들여보낸 적은 없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군.”

“저는…. 그럼….”

“앞을 보면서 걷도록 하거라. 그러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을 땐 푸른색 실을 따라가도록.”

 

황제는 푸른 실을 따라가란 묘한 말을 남기고서 사라졌다. 지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 따위는 한 홀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앞만 보면서 걷도록. 하나였다. 무작정 걷기로 한다.

 

 

 

 

 

먼 곳에서 먼지가 일었다. 이내 소음이 번진다.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가 고궁 안에 들어섰다. 뒤 따르는 내관과 나인이 수십이었다.

 

“태후마마는 왜 어린 윤 씨를 황제의 자리에 올린 걸까?”

“소문 못 들었어? 이 나라가 다른 놈들에게 팔린다잖어.”

“그래서 태후마마가 태자 전하부터 애기씨들까지 애저녁에 남만(영국)이니 왜국이니 죄다 보내버렸잖아. 아무도 모르게.”

“윤 씨는 태후마마 핏줄이래. 천애고아라 이런 일, 막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지.”

“누가 자기 자식새끼를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고 싶겠어.”

 

수군거리는 소리가 뚜렷하다. 마차의 안쪽에는 어린 황제, 정한이 들어있을 테지. 저를 두고 하는 말들을 다 들었을 것 같아 염려되었다. 걱정했던 그대로 정한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열 두어 살은 되었을까. 커다란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린다. 몸집처럼 가냘픈 숨을 뱉어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식은땀과 눈물로 푹 젖은 얼굴을 쓸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황제는 고작 십여 년을 살다 외로이 죽어갈 것이다. 지나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눈앞에서 푸른색 실이 흔들렸다. 지나는 호기심에 실을 쥐었다. 마차를 따라가려 노력하지 않아도 마치 바람처럼 몸이 움직였다. 영화 속 장면이 바뀌듯 시공간이 뒤틀린다. 시간의 흐름에 의해 저도 함께 흘러가는 것 같았다.

 

다음 장소는 편전이었다. 용석에 정한이 자리했다. 정한의 등 뒤, 정한보다 더 높은 상석이 존재했다. 짙은 발을 드리운 곳에는 목청이 정정한 노인이 대신들과 국정을 논하고 있었다. 정한은 당연한 것처럼 철저하게 배제된 채였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릇됨을 알면서도 편전 안의 모든 이가 모른 척 한다. 궁에서 부정한 일이 벌어지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야 할 유학마저 잠잠했다. 태후가 지닌 권력이 그러했으므로. 궁궐 담벼락에 나란히 효수 되는 일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혀가 없어진 사람처럼 정한은 소리를 참는다. 원망을 감춘다. 아픈 것도 눈물 훔치는 일도 남들 몰래였다. 궁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태후에게 납작 엎드리는 일이었다. 자신을 비참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목숨 구걸하는 일들로, 하루씩 버텨가며 사는 것조차 벅차서. 나머지를 돌 볼 겨를이 없었다.

 

정한은 겁에 질린 얼굴로 뜸하게 주어지는 서면 위에 옥쇄를 찍었다. 내용을 읽어보려는 노력 따윈 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곁을 지키고 서있는 늙은 내관이 뺨을 맞았다.

 

몇 날 며칠 비슷한 하루가 지루하게 이어진다. 겁에 질렸던 정한의 얼굴은 이제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체통을 지키면서도 신속하게 옥쇄를 다루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것이다. 남는 시간동안 정한은 태후에게 배운 미륵상생경과 반야심경의 구절을 속으로 외웠다. 얻을 것이 없으니 욕심내지 말라. 헛된 생각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라. 적당한 때에 조용한 안식을 맞을 것이다.

 

아무리 어린 정한이라 할지라도 태후가 집어준 불경의 속뜻을 모르지 않다. 어린 황제에게, 네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 것이며 헛된 꿈을 버리라는 뜻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조용한 안식 후에 맞게 될 날을 기다리란 마지막 구절까지. 그야말로 완벽하다.

 

꼭두각시 황제. 정한은 저를 조롱 중인 단어를 절반만큼만 이해했다. 황제 노릇은 해본 적 없었으나 꼭두각시라면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행한 탓에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으므로. 이해라 할 것도 없었다.

 

늙은 내관은 더 이상 뺨을 맞지 않는다. 궁은 늘 그렇듯 평화로웠다. 정한 한 명의 불행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었다.

 

 

 

 

 

푸른 실이 끊겼다. 세상은 처음처럼 흑백 풍경이었다. 지나는 주위를 둘렀다. 온갖 색의 실을 발견했지만 푸른 실만은 찾을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붉은 실을 잡기로 한다. 꼭 저를 유혹하는 모양새로 빛나고 있는 실은 붉은 색이 유일했다.

 

세상이 몇 바퀴쯤 돌자 도성 밖이었다. 정한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포대기에 싸인 갓난쟁이를 안아 들었다. 아비로 보이는 듯한 남자 뒤를 아무 말 없이 따랐다. 아이나 아비나 행색한 꼴이 길 위를 스치는 누구보다 처참했다. 지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아이가 황후라는 것을.

 

아이는 질척이는 흙투성이 길을 불편한 걸음으로 조심조심 걷는다. 앞이 터진 짚신 새로 시커먼 진흙이 스몄다. 푹 젖은 발이 기분 나쁘다. 그래서 낯선 남자들이 저를 힐끔거리고 있음을 뒤늦게 느꼈다. 아이는 꼬질꼬질 때가 탄 발가락을 움츠렸다. 점점 더 진득하게 박히는 시선을 자신의 더러운 발 탓이라고 여겼지만 이유가 다르다. 축축하게 젖은 제 앞섬 탓인 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는 자꾸만 울며 보채는 아기를 토닥여 달랜다. 고사리처럼 가냘픈 아기의 손이 아이의 저고리를 훔쳐 쥐었다. 그리고는 새보다 더 작은 입속에 넣고 빨았다. 밥 먹어야 하는데…. 우리 애기 밥 먹어야 하는데.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다. 아이는 제 품안의 아기처럼 울먹인다. 한참을 걸어도 아비는 걸음을 멈출 것 같지 않다. 결심한 듯 아이가 말했다.

 

“아버지, 어딜 가는 거에요. 네?”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아이는 결국 제 아비의 팔을 붙들었다.

 

“아버지. 네?”

 

대답 대신 커다란 주먹이 날아왔다. 시퍼런 아이의 뺨 사이로 이제 막 노랗게 핀 멍 자국. 그 위에 붉은 자국 하나가 더해졌다. 오래된 상처 위에 끼얹은 새로운 상처. 그냥, 그 정도 일쯤으로 느껴졌다.

 

아이는 비명 지르지 않는다. 품에 든 아기가 다칠까봐 둥글게 움츠리는 것이 전부였다. 눈을 다치지 않아서. 이가 부러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질리도록 겪은 것이다. 얼굴에 든 멍도, 매를 맞는 자신도. 특별히 불운하다 생각한 적 또한 없었다. 저와 처지가 비슷한 아이들이 많았다. 이 시대의 아비들은 흔히들 그랬다. 폭력으로 가정을 다스리는 것을 퍽 자랑으로 여겼다. 아이가 까맣게 더러워진 발보다 울긋불긋 물든 제 얼굴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 탓이 컸다.

 

“얼른 안 따라와?”

 

벼락처럼 쏟아지는 호통에 걸음을 서두른다. 덤덤한 표정을 한 아이는 제 앞섬을 조금 풀었다.

 

“언제 이렇게 젖었지….”

 

아이는 양감이 미미한 젖을 물린다. 자신의 일부를 맹렬히 빨고 있는 아기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화인이었구나, 저 아이. 지나는 저도 모르게 깊이 탄식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땐 머리 위로 뜬 해가 창창했었는데 어느덧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아이의 걸음이 위태롭다. 걸을 때마다 힘껏 휘청이고 있었다. 지나의 마음 같아서는 아이 품에 짐처럼 들러붙은 아기라도 빼앗고 싶었다. 아이의 어깨를 붙들었으나 잡혀오는 것이 전혀 없다. 이 세계에서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각기 다른 이유로 괴로움에 빠진 아이들을 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더욱 고통스러웠다.

 

“붉은 실을 건드렸구나. 붉은 실은 황후의 기억이지.”

 

나의 황후가 슬퍼할 거야. 짙게 원망하는 목소리. 정한이었다. 안 그래도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정한은 저를 원망하고 있었다.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성급히 내뱉어진 말투에서 확연한 적의가 드러났다.

 

“푸른 실이 없었어요.”

“조금만 더 살폈더라면 찾아냈을 것이다. 붉은 실을 건드려서 괴로워할 일은 없었을 텐데.”

“이곳 일에 휘말린 건, 애초에 폐하 때문이에요.”

“…그래. 내 탓이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마지막 말을 유언처럼 남긴 정한은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혼자 남은 지나는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 해 흙 길 위로 발을 굴렀다.

 

“이제 그만 하고 싶어….”

 

울먹이면서도 걸음은 꾸준했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비는 어느 대감 댁에 들어섰다. 이미 까만 밤이 내려앉은 후였다. 뒤늦게 따라온 아이의 팔을 거친 손길로 잡아끌었다. 아이의 어깨를 눌러 무릎 꿇린 뒤 자신도 무릎 꿇는다. 고개는 바닥에 처박힐 듯 했다. 청지기가 다가와서 아비와 아이를 살폈다.

 

“수원에서 올라온 아무개요?”

“예, 수원 아무개입니다.”

“왜 이리 늦으셨소. 유모는 이미 구했소만.”

“아이고 나으리….”

“더군다나 당신이 데려온 것은 사내아이가 아니오.”

 

아비는 크게 상심하여 아예 주저앉아 곡을 한다. 느닷없는 소란에 노비 두엇이 나타났다. 끌어내겠습니다. 조용히 속삭이는 것에 청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웬 소란이야.”

“대감마님.”

 

청지기와 노비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단단한 풍채의 남자에게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좌의정 홍 대감. 그럭저럭 괜찮은 세력가의 사람이었다. 홍 씨는 대대로 황제의 측근에 선 가문이었으나 홍 대감에 의해 변절되었다. 그는 최근 태후에게 돌아선 인물 중 하나였다.

 

“유모 일로 찾아온 치이옵니다. 허나 이미 유모는 다른 이에게 낙첨 되었고 아무개는 엉뚱하게도 사내아이를 데려왔지 뭡니까.”

“사내아이라.”

 

아비는 무릎으로 기어 홍 대감 앞까지 다다랐다. 나으리, 하며 넙죽 인다. 비굴한 모양새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홍 대감의 바지 자락을 붙들고 사정한다.

 

“사내아이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젖도 아주 잘 나오구요, 계집아이보다 체력도 좋으니….”

“그만하거라. 되었느니라.”

“나으리!”

“그만하래도.”

 

아이는 한 발 늦게 달려왔다. 아비를 따라서 얼른 무릎 꿇었다. 제 아비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주제에 함께 읍소한다.

 

“횃불을 가져오게.”

 

홍 대감은 천천히 턱을 쓸었다. 설핏 나타났던 아이 얼굴이 제법 그럴 듯해서였다. 청지기가 건넨 횃불을 받아 들고선 아이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치켜든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영락없는 거지꼴임에도 무어라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인내하느라 입술이 멋대로 비죽였다.

 

“청지기는 주위를 물리거라. 이 시각 이후 아무도 밖을 내다보게 해선 아니 된다. 단속을 마치면 사랑채로 건너오게. 아무개는 아이와 함께 나를 따라오거라.”

 

흙투성이 무릎을 털 새도 없었다. 아이와 아비는 홍 대감을 따라 널따란 마당을 가로질렀다. 작은 문을 지난 후 구불구불한 정원 틈을 스쳐 후원에 다다랐다. 대청에 오른 홍 대감이 아이와 아비를 돌아본다.

 

“들어오게나.”

 

아이는 품에서 잠든 아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제 발에 들러붙은 흙을 아주 오랫동안 털었다. 안쪽에서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행동을 서두른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아비가 걸어 나왔다. 커다란 은덩이를 툭툭 던져대며 잡고 놀았다. 아이에게 안겨 있는 아기를 빼앗듯이 안아들었다.

 

“아버지.”

“잔말 말고 들어 가.”

“아버지…. 애기는….”

 

쓰읍. 아비는 입술 새로 성을 내며 위협했다. 좀처럼 안쪽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아이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잘 살 거라.”

 

그놈 참 효도 한 번 톡톡하게 하는 구먼. 읊조리는 소리에 아이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등 뒤에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청지기가 나타날 때까지 아이는 아무 말 않고 눈물만 쏟았다.

 

“아비가 너를 버린 것이 그렇게 슬픈 일이더냐.”

“마님께서 묻지 않니.”

“아기가, 애기를….”

“네 아이더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돌려주면 그 울음 좀 그만둘 수 있겠느냐.”

“…그리하겠습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을 그친 아이는 심지어 미소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홍 대감은 연신 자신의 턱을 쓸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몇 번씩 미간을 구겼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 너를 황후로 만들 것이다.”

“대, 대감마님….”

 

오랜 고민 끝에 뱉은 말이었다. 놀란 것은 청지기 하나였다. 아이는 아기를 돌려주겠다는 말을 들은 뒤로 줄곧 평온한 표정을 했다. 제 말을 알아듣지 못 한 것일까 생각했던 순간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기만 볼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옵니다.”

 

넙죽 엎드리며 절했다. 말하는 꼴이 제법 당차다. 홍 대감이 크게 웃었다.

 

“맘에 드는군. 허나 네 아비가 죽을 것이다. 그리 해도 괜찮겠느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구태여 들을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여태 본 얼굴 중에서 가장 보기 좋은 얼굴을 했다.

 

 

 

 

 

/

 

 

 

 

 

아이는 새 이름을 받았다. 태어난 지 십삼 년 만에 받은 첫 이름이었다. 성씨는 홍 대감의 것을 따랐다. 왜국으로 도피시켰던 홍 대감의 막내아들, 홍지수의 인생을 빌어 살아갈 것이다. 이름 없이 아무렇게나 불리며 사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었는데. 이름을 처음 받았던 날, 지수는 저도 모르게 오열했다. 아이를 빼앗겼을 때보다도 더욱 크게 울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지수는 아직도 지금이 얼떨떨하다.

 

글을 배웠고 사대부의 예의범절을 익혔다. 홍지수로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의 남성성을 버려야 했다. 홍 대감에게 화인은 남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홍 대감의 뜻에 따라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항상 지켜야 할 것이 많았고 어기면 안 되는 일들에도 끝이 없었다. 여성의 복식을 입어야 하는 점이 가장 불편했지만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홍지수는 더 이상 모르는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홍지수는 구걸하지 않고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지수는 홍지수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가끔씩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온 힘껏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홍 대감은 지수를 황후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할 셈이었다. 실제로 아비가 죽었고 제 몸을 취한 자들도 같은 꼴을 당했다. 지수의 고된 과거가 들켜버릴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여기까지는 솔직히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황제의 혼인단자를 받은 여인들이 차례차례 죽어 나갔다는 것에 있었다. 이제 세력가의 여식 중 멀쩡히 남은 것은 저 혼자였다. 범인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지수는 다른 이를 의심할 수 없었다.

 

모든 인과가 저를 향했으므로 지수는 날마다 악몽을 꾼다. 죄 없는 자들이 저 때문에 명을 달리했다. 얼굴도 모르는 어린 목숨에게 매일 밤 목이 졸린다. 바짝 졸린 목으로는 살려 달라 빌 수조차 없었다. 울다 지쳐 퉁퉁 눈으로 깨어났을 땐 이미 아침 해가 훤하게 떠 있었다. 그런 날과 그런 밤이 영원할 것 같다고. 지수는 생각한다.

 

붉은 실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지나는 지수를 떠나기 전, 지수의 마지막 감정을 온전히 느꼈다.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으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지수는 제 목을 졸라가며 괴롭히는 귀신보다 아비를 무서워했다. 홍 대감은 그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황제는…. 황제는 어떠할까. 떠올릴수록 몹시 혼란스러워 했다. 지수는 조금씩 예민해졌다. 자연스런 수순처럼 제 속으로 낳은 아이와 멀어졌다. 끔찍이 사랑했던 관계에도 금이 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 무엇이든 덧없어 했다. 전보다 나은 삶임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행복하다 말하기는 힘들었다.

 

지나는 먹먹한 기분으로 푸른 실을 찾아 헤맸다. 더는 감정에 섞여들어 고통 받고 싶지 않다.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지나가 실을 잡았을 땐 사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년이나 뛰어 넘을 수 있다니. 조금은 축복처럼 느껴졌다.

 

 

 

 

 

볕이 좋은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정한은 자신의 열일곱 생일을 사냥터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탄신일 동안 벌어질 연회들이 어마어마했으므로 궁 안에서 보내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관상감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폐하의 혼인단자를 받은 여인들이 단명하였으니, 폐하께서 직접 피를 보신 후 제물과 함께 예를 올려 속죄하셔야 한다, 는 명목이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이는 분명 좌의정 홍 씨의 입김이 닿았음이다. 그간의 시간들이 지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듯 정한의 삶 또한 조금씩 변모했다.

 

궁 안의 낡은 사람들을 노력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한은 새 것의 사람에게 씨앗을 심고 오랜 시간 인내했다. 올해부터 결실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얻었다. 바짝 엎드리며 산 세월 치고는 괜찮은 미래였다.

 

정한은 사냥하는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알면서도 휘둘리는 것은 여전히 별로였다. 좌의정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활 질을 서두르다 화살촉에 손을 베었다. 정한은 옅게 핏물이 배어 나오는 상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끝내 작게 실소한다. 적잖이 동요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깨달았다.

 

“오늘은 영 재미가 없군.”

 

먼 곳에서 붉은 깃발이 올랐다. 곧이어 노란 깃발이 섞여들었다. 붉은 깃발은 곰을 뜻했고 노란 깃은 황제를 의미한다. 두 가지의 깃발은 점차 정한을 향했다. 수색꾼들이 곰을 몰고서 저를 향해 달려오는 중이란 뜻이었다.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성 잃은 곰의 울부짖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정한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태연한 것은 정한 혼자였다.

 

거대한 형체는 예상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 바로 코앞에서 나타났다. 정한은 손에 쥔 활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폐하, 폐하! 외치는 소리들을 무시한다.

 

정한은 동요하지 않았다. 저를 태운 말을 익숙하게 뒤로 물린다. 말의 인장에 매달아 두었던 장검을 뽑아 그대로 집어 던졌다. 한쪽 눈에 장검 박힌 곰이 풀썩이며 쓰러진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내뱉은 음성이 무심했다. 정한은 곧바로 말을 달렸다. 겸사복 몇이 즉시 뒤를 따랐다. 제법 먼 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사냥터 밖에 자리한 황가의 저택이었다. 정해진 사냥을 마치면 늘 이곳에 들러 피곤을 달래곤 했다.

 

황가의 저택은 황실 사람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다. 정한을 지켜야 할 겸사복마저 저택 주위만을 맴돌아야 한다. 때문에 시중드는 이는 전대 황제가 천거한 늙은 노인 한 명 뿐이었는데, 정한은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모처럼 남의 눈을 벗어나 오롯이 혼자 쉴 수 있는 공간은 이곳이 유일했다.

 

정한은 말을 끌어 마구간에 넣었다. 물과 여물을 적당히 채운 후 말의 깃을 쓰다듬었다.

 

“오늘 고생 많았다. 편히 쉬거라.”

“폐하.”

 

밖에 선 누군가 저를 불렀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 연약한 목소리. 귀에 익은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정한은 조심스레 허리춤을 더듬는다. 제대로 길들인 장검은 곰의 눈알에 박혀 버려두고 왔으나 손끝에 잡힌 단도 또한 훌륭히 쓰일 터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여인인 듯 그렇지 않은 듯. 묘한 행색의 누군가. 정한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고아한 모양새로 허리를 접었다.

 

“오늘 밤 폐하의 시중을 들 홍가의 지수라 하옵니다.”

“시중이라면 천 씨가 있지 않은가.”

“천 씨는 지병이 도져 인가로 내려갔습니다.”

“홍 씨라 하였느냐.”

“그러하옵니다.”

 

정한은 코웃음 쳐 눈앞의 사람을 비웃었다. 좌의정이 놓은 술수치고는 너무 얄팍하지 않은가.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 대감댁에서 배운 그대로 정한의 시중을 들었다. 겉의 적삼과 단고를 벗긴다. 고작 그 정도 일을 하면서도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다. 부디 티가 나지 않아야 할 텐데. 지수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짓씹는다. 정한에게선 수상한 향기가 끼쳤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폐부를 침입하여 몸 속 깊은 곳까지 멋대로 달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마저 점점 혼곤해진다. 지수는 아마도 정한의 향기 탓이리라 짐작한다.

 

배움의 기억을 떠올리려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양치와 세수의 순서, 마른 수건을 건네는 적절한 때를 공들여 지켰다.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천 씨에게 배운 것입니다.”

 

저를 의심하여도 어쩔 수 없다. 순서를 지키지 않아 침전에서 쫓겨나는 것보다야 나은 일이었다. 지수는 방향에 맞추어 두터운 이불을 깔았고 그 위에 베개를 얹었다. 작은 호롱만을 남겨 둔다. 나머지는 모두 꺼뜨렸다. 호롱을 끼고서 얌전히 자리 잡아 앉았다. 저도 모르게 정한과 거리를 벌렸으나 이제 와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오래 머물 필요는 없다. 황제가 너를 원치 않거든 미련 없이 침전을 떠나거라.

 

지수는 홍 대감의 당부를 떠올린다. 오래 머물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그 오래가 어느 정도인지 저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백까지만 세어 보기로 한다. 일에서 시작한 숫자는 어느덧 육십을 향해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너를 어찌 하면 좋겠느냐.”

 

생각해본 적 없는 물음이다. 숫자 세는 것을 멈추고서 지수는 잠시 고민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일 것입니다.”

 

적절한 대답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줄곧 정적이었다. 지수는 처음부터 다시 숫자를 세었다. 백까지 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쯤하면 되었지 않았을까.

 

“소인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몸을 일으키기도 전이었다. 갑작스레 손목이 당겨졌다. 풀썩 쓰러지는 지수를 정한이 받아들었다. 품에 안긴 모양새. 정한과 제 사이가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웠다. 헐떡이며 내쉬는 숨이 그대로 섞여버릴 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째선지 부끄러워진다. 지수는 가끔씩 호흡을 멈추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제가 토해낸 커다란 숨을 정한은 그대로 받아 마셨다. 지수는 제 몸을 차지한 정한의 무게감을 모른 척 한다.

 

앞섬이 함부로 풀어진다. 거칠게 파헤쳐진 치맛자락이 단숨에 허리춤까지 끌어 올려졌다. 드러난 목덜미에, 움푹 파인 쇄골 위로 정한이 얼굴을 묻는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겠소.”

 

정한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지수는 옅게 신음했다. 저절로 벌어진 허벅지 틈으로 정한이 스몄다. 서로를 욕망한다. 성기만 겨우 가린 얇은 천 조각은 단단하게 발기한 정한의 것을 느끼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정한은 지수에게 입 맞추지 않았다. 들뜬 어깨와 허리를 안아 올리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래서 더욱 힘겨운 밤이 지나갔다.

 

지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해가 떠오르고 날이 밝으면 정한은 저를 두고 떠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몇 년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존재였는데 왜 이제 와서 헤어짐이 아쉬울까. 생각을 곱씹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지수가 눈을 떴을 땐 엉망으로 풀어진 앞섬과 치맛자락이 단정하게 매어져 있었다. 꼭 당연한 일처럼 지수 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혼자서 울먹이며 하는 말을 누구라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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